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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uttila, Sima & Saarinen, Risto., Luther's Trinitarian Theology and its Medieval Bacjground, Studia Theologica 53(1999)-2
루터의 삼위일체 신학과 그 중세적 배경
오상호 번역
역사 신학에서 가장 넓게 수용된 패러다임중의 하나는 백년 전 Theodore de Regnon이 제시한 좀더 카파도키아의 동방 전통으로부터 거리가 먼 서방 중세 신학에서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어거스틴주의의 개념이 삼위일체적 위격(persons)들의 교리가 신적 특성들( properties)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추상적 논의들로 빠져갔고 그 배경에 남아있다는 범위까지 지배적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이고 서로 다른 신학전통들 사이를 비교하거나 혹은 중세와 근대초기 신학에서 연속성과 혁신을 추적하면서 그것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의 의미론
Abelard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Roscelin은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다름과 같이 설명한다. 다양한 이름들은 거룩한 삼위일체 안에서 신적 본질(the divine substance) 그 자체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substance'라는 단어로 언급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person'이란 단어를 사용해서는 않된다. 만약 이것이 Roscelin의 견해라면, 어떻게 그의 이론이 Soissons(1092)의 지역 회의에서 삼신론의 한 형태로서 비난받을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을까? Roscelin은 비록 신적 본질(the divine substance) 그 자체가 분리될 수 없지만(indivisible), 세 위격들은 세 가지 것들(tres res)이라고 분명히 생각했다. Anselm of Canterbury와 다른 동시대인들은 Roscelin의 공식들이 이단적으로 위격들을 세 신들인 것으로 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아마도 이것은 오해였다.
동시대의 다른 본문들은 Anselm의 비난을 실증함없이 '세 가지 것들'(three things)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11세기의 익명의 본문에서 위격들은 어떠한 설명없이 '세 가지 것들'(three things)로서 묘사되는데,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substance들을 구성하지도 않고 substance의 부분들도 구성하지 않고 또한 범주적 정의들에 의하여 서술되는 다른 어떤 것도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된다. 이런 복수(plurality)는 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대안들은 본질적 설명의 가능성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마주 보고 있는 관계들은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는데, 아마도 자연적 언어에서 그것들은 실제로 구별되는 주체들을 전제한다라는 이유 때문이다. 11세기에 신적 본질(the divine essence)의 단일성과 단수성과 구별되는 위격들 사이의 복수성 사이의 관계성은 삼위일체적 신학의 어려운 기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Roscelin 아래에서 잠시 공부하고 그의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Abelard는 그의 선생이 했던 것과 같이 동일한 종류의 어려움에 희생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특별한 신적 속성들로서의 위격들에 대한 Abelard의 이론은 결국 Soissons(1121) 회의에서 사벨리안적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회의는 Abelard의 공식에서 위격들이 서로 불충분하게 분리된다고 판단했다. 동사에 그의 이론은 아리안적 삼위일체적 종속주의의 한 형태로 정죄되었다. 양 비난들은 또다시 Sens 회의(1140)에서 Abelard의 신학에 대하여 제기되었다. 아무리 심각하게 고려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상반되는 이단들 모두를 합병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그럴 듯 하지 않지만, 그러나 전통적 신경들의 확증들에 전해진 긴장들 때문에 신학적 공식들을 의심하게 되는 것은 쉬웠다. Abelard의 신학은 정죄되었지만, 그러나 언어의 논리와 개념적 분석에 대한 그의 언급들은 그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보다도 더욱 그 이후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Abelard의 삼위일체적 신학의 대표는 셋으로 구성된 Omnipotence Wisdom-Goodness의 중심적 역할이다. 이들 서로 양립할 수 있고 근본적인 특징들은 삼위일체를 양식의 방법으로 설명라는데, 그 안에서 그들은 위격들에 적절하다. 아버지는 그의 기원을 가지지 않는 것을 통하여 다른 위격들로부터 구별된다. 지혜로서 아들은 전능하신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출생한다. 선과 사랑으로서의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 Abelard의 후계자들, 특히 Robert of Melun은 위격들을 구성하는 본질적 속성들과 특질들(the essential attributes and the qualities) 사이의 차이를 구성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선생의 사고에 어느 정도 부정확하게 있었다. 이것은 삼위일체적 관계들, 특성들(proprieties), 그리고 사용들(appropriation) 사이의 구별들에 관한 광대한 논의의 출발이었다.
Gilbert of Poitiers는 그의 신성에 대한 교리 때문에 교회 권위들과의 불화로 나아갔다. Abelard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Berbard of Clairvaux는 1148년에 Gilbert에 반대하는 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Gilbert가 선호한 위격적 용어들(the personal terms)은 paternitas, filiatio, connexio였다. 삼위일체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Gilbert는 이런 관계들을 외적인 측면들로서 특징짓는다. 위격들(persons)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명백히 신적 본질로부터 달라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quod est와 quo est 사이에 실제적인 구별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natura와 persona 사이뿐만 아니라 deus와 divinitas 사이에 어떤 종류의 차이가 자명한 것으로 가정된다. 비록 Gilbert의 공식들이 거부되었지만, 그것들은 후대의 논의들을 계속해서 형성했다. Abelard와 같이, Gilbert는 삼위일체를 신비로서 설명한다; 신학적 구별들(distinction)은 우리가 자연적인 것들에 대하여 말하는 방법과 달리 기독교 교리의 계시적 언어를 이해하는 목적을 위해 유용할 수 있다.
12세기의 다른 어떤 다른 사상가들 보다 더욱 Abelard는 그의 삼위일체적 연구들에서 동일성과 차이들(identity and difference)의 개념들의 논리에 집중한다. 이 문제에 관계된 그의 생각들은 그 이후의 저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발휘하였다. 이것은 예를 들어 identitas naturae versus identitas proprietatis, identitas essentiae versus identitas personae, idem qui versus idem quod, 혹은 어거스틴적인 alius versus aliud 와 같은 그런 구별들의 인기를 보여준다. 이런 개념적 정의들은 Peter Lombard의 Sententiae와 본질과 위격들의 동일성과 상호 위격적 비동일성에 관한 4차 Lateran 회의의 잘 알려진 공식에 영향을 미쳤다.
용어적 구별들에 대한 논의는 종교개혁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14세기에, 성과들이 삼위일체적 명제들을 위한 의미론적이고 논리적인 규칙들로 체계화되고, Sentences에 대한 여러 주석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음집들에 상세화된다. 이러한 모음집들의 목적은 어떻게 모순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규칙들은 동시대적 논리적이고 의미론적 이론들과 일치하여 구성되었다(suppositional theory, the theory of paralogisms, obligational logic); 그것들은 삼위일체의 본질에 대한 실체적인 이론(substantial theory)보다도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더욱 안전한 수단으로 생각되었다.
존재론적 견해들
개념적 분석들에서의 전술한 저작들과 나란히, 삼위일체적 발현들과 사랑의 교통에 집중한 Richard of St. Victor의 신학적 노력들은 12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성과물들에 속한다. Richard에게, 아버지는 사랑의 기원되지 않은 기원이고, 아들은 사랑의 수용자이고 사랑의 기증자이며, 성령은 수용되는 사랑이다. Richard의 신학에서, 위격들은 존재의 방법들이고 신적 사랑의 발현들이다. 관계적 개념들은 배경에 유지된다. 이런 방법의 사고는 William of Auxerre, William of Auvergne, Alexander of Hales의 학파로부터 나온 프란시스코 학파의 Summa Halensis의 삼위일체적 논문들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위격들의 발현에 대한 생각이 삼위일체에 대한 어거스틴의 심리적 설명에 지배적이지만, 관계적 개념들은 그의 De trinitate의 첫 위치에 주어진다. Thomas Aquinas는 어거스틴적 삼위일체적 신학의 관계적 입장을 더욱 체계화하였다. Aquinas에 따르면, 신학적 위격들은 서로간에 마주보며 실재하는(subsistent) 관계들이다: paternity, filiation, spiration. 그것들은 본질(the essence)과 동일시되고, hypostases로서 서로 다르다. Aquinas는 Gilbert of Poitiers과 달리 그가 위격들과 관계들이 동일한 것으로 고찰한다고 강조한다.
삼위일체적 도그마가 이런 방법으로 더욱 쉽게 이해되느냐 라는 것은 의문으로 남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든 토마스주의의 입장은 영향력있는 신학적 모델이 되었다. Thomas Aquinas에 따르면, 발현들과 관계들은 동일하지만 그러나 서로 다르다 secundum modum significandi et intelligendi. 오직 관계들만이 위격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도미니칸 신학이 Aquinas를 따르는 반면, 일부 프란시스칸들은 Bonaventure와 Henry of Ghent를 통한 Richard of St. Victor로부터 유래된 전통을 더욱 적절한 것으로 발견하였다. 프란시스칸들의 입장은 어거스틴적인 것으로 서술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심리학적 해석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Bonaventure에 따르면, 아들이 출생되어야 했다(should be generated)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그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그가 출생되었기 때문에(because he is the Son) 그는 아들이다 라고 생각해야 한다. 동일한 것이 다른 위격들에도 말해질 수 있다. Henry of Ghent는 삼위일체에 대한 Bonaventure의 emanationist적 교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위격들은 원래적으로 대립되는 관계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 안에서 존재의 구별되어 발산하는(emanative) 방식들로 구성된다. 지성과 의지의 신적 능력들이 발현들을 위한 근거를 구성한다는 그의 생각은 특별히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Duns Scotus에게도 지성과 의지는 발현들을 위한 근거들과 생산적 원리들이다. Scotus는 인격적으로 구성적인 관계들에 관한 교리를 추측으로 여기고, 위격들은 원래적으로 절대적인 특성들로 구성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고 이단적이지 않다 라는 것을 강조한다. William of Ockham에 따르면, 관계들과 발현들은 삼위일체 안에서 동일하다. Thomas Aquinas에 반대하여 그는 양자는 동일하게 구성적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수의 입장들과 그들의 결과된 영향이 매우 적게 연구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거스틴적인 Pater principium divinitatis와 같은 전통적 공식들에 대한 해석들은 강조점이 관계들에 있느냐 혹은 발현들에 있느냐에 따라 주목할만하게 달라진다. 동일한 것이 "만약 성령이 아들로부터 발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그런 원리들에도 유지된다.
루터의 마지막 논쟁
1545년 7월 3일 Peter Hegeman의 박사논쟁(the promotional disputation)은 그가 준비한 테제들을 루터가 담당한 마지막 학문적 논쟁이었다. 테제 1-17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것들이다. 논쟁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것들은 다른 단계들에서 논의되었고, 분명히 논리적 질서가 없는 가운데 논쟁되었다. 루터가 그의 테제들을 통하여 삼위일체적 신학에 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인가?
먼저 루터의 자료들을 살펴보자. 루터는 어거스틴의 De Trinitate, Peter Lombard의 Sentences, Sentences에 대한 Gabriel Biel의 주석을 알고 있었다. 루터는 그의 이후의 disputation들의 일부에서 Peter of Ailly의 삼위일체적 규칙들을 사용하였다. 삼위일체적 신학에 대한 질문들에서 Biel은 Aquinas와 Henry of Ghent가 자주 비판한 Sentences에 대한 William Ockham의 주석을 가깝게 따른다. 그래서 루터는 적어도 Biel의 저서를 통하여 Ockham, Henry, Aquinas의 입장을 알았다; 아마도 비록 루터가 처음에 Ockham과 Aquinas를 연구했을지라도. 신학교수로서 그는 중요한 synod들과 Council들의 삼위일체적 결정들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1-17의 테제들의 테마는 '아버지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아버지의 지혜(sapientia Patris)로서 아들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자주 중세 신학에서 논의되었는데, 왜냐하면 어거스틴이 그것을 문제있는 것으로 보았고 상세하게 De Trinitate VI, 1-7과 VII, 1-6에서 다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이 주제의 역사를 논의했다; 여기에서는 만약 '아버지의 지혜'가 본질적 술어(the essential predication)로서 읽어진다면 그것은 특성(a property)이고 만약 그것이 관계적 표현으로서 읽어진다면, 그것은 아들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테제 1-5에서 '아버지의 지혜'는 어거스틴, 피터 롬바르드, 토마스 아퀴나스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다루어진다. 지혜, 능력, 선과 같은 본질적 속성들은 모든 인격들이 신적 본질(the divine essence)과 같은 것처럼 모든 인격들을 서술할 수 있다. 테제 6-10에서 루터는 전통적인 삼위일체적 용어를 다룬다. 소위 Anselm의 규칙들은 올바르게 테제 6에서 어거스틴에게 돌려진다. 관계들의 교리는 가장 어렵지만 그러나 또한 테제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구성한다(테제11-16). 테제 11-13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이고 특별한 학파의 사고의 견해를 나타내지 않는다. 테제 13에서 신적 위격들은 세 실재하는 관계적인 것들(three subsistent relational things)로서 이해될 수 있었고 하나님 안에서 본질과 위격 사이에는 실제적 구별이 없다는 것이 말해졌다.
진정으로 어려운 테제들은 14-16이다:
14. 여기에서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구별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구별되는 것들이 관계의 존재를 지적한다.
15. 다음이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아버지는 지혜롭고, 그러므로 그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의 지혜는-그에게 관계된 어떤 것으로서-그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다.
16. 비록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올바르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관계되고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와 구별되는 hypostasis이고; 그리고 성령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테제 14에서 '여기에서'라는 단어는 테제 13에서의 in divinis에 대한 언급이다. '아버지의 지혜'라는 논쟁의 실제 주제는 테제 15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그것은 테제 14에서 제시된 주장의 한 예이다. 우리는 먼저 이 예의 본질을 살펴볼 것이다. 그후 우리는 테제 14에서 제시된 일반적 주장의 의미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분명히 할 것이다.
테제 16에 따르면, 아버지, 아들, 성령은 관계적 개념들인데 그것으로부터 실제 '타자'의 존재(presence)가 논쟁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관계적 용어들은 두 다른 구성원들을 의미하는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테제 15에서 '아버지의 지혜'는 관계적 개념으로서 취급된다. 두 번째 명제, 즉 '그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의 지혜는 그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다' 라는 명제는 첫 번째 명제, 즉 '그 자신 안에서 아버지는 지혜롭다'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계속해서, 두 번째 명제는 아버지의 지혜(sapientia Patris)로서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서의 동일한 본질과 구별된 hypostasis라는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두 번째 명제에 대한 이러한 독해는 '지혜롭다'는 것이 본질적 속성에 대한 언급으로 취해질 수 있는 곳인 첫 번째 명제로부터 나오지는 않는다. 두 구별되는 것들 사이의 관계의 존재는 덧붙여진 전제(premise)로서 들여와야만 한다.
(a)아버지는 지혜로우시고(sapiens) (b)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지혜(sapientia Patris)이다 라는 신학적으로 참된 주장들에 의하여 우리는 두 구별된 hypostases에 관한 교리를 충분히 정당화할 수 없다. 원리적으로 (a)와 (b)를 사벨리안적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심지어 우리는 '아버지의 지혜'라는 표현이 두 개의 구별되는 것들을 포함한다라고 구체화할 수 있기 이전에, 두 개의 구별되는 것들, 예를 들면 두 위격들이 있다 라고 전제한다. 반대되는 관계들의 경우에, 이 전제는 명백하다. 이것이 어떻게 테제 15가 테제 14의 주장을 예증하는 지를 의미한다.
테제 14에서 루터는 구별되는 것들이 관계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주장하는 대신에(테제 14), 한편으로 위격들(persons)을 실제 관계들(테제 13)로서 취급하는 것을 허락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관계들을 위격들의 실체의 최종적 근거로서는 취하지 않는 관계들의 교리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루터의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Bonaventure와 Henry of Ghent의 견해들에 어느 정도 범위에서 유사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왜냐하면 그가 출산하기 때문이다; 그는 출산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구별되는 발현들(Henry) 혹은 구별되는 것들(Luther, th. 14)이든 관계들의 '뒤에' 어떤 것이 놓여있다.
논쟁의 기록에서 관계들과 발현들 양자는 위격들을 구성적으로 선언한다. 루터는 다시 한번 양 측면들을 함께 언급하는데, 그러나 그가 '관계'로서 서술하는 사건들의 상태가 실제적 사실에서 발현이다라는 그런 형태로 언급한다. 여기에서 루터는 관계들과 발현들을 동일시하는 오캄주의자들을 받아들이는 듯 하다.
그의 마지막 논쟁에서 루터는 관계들보다는 발현들에 더 집중한다; 관계들은 광범위하게 우리의 논의에서만 논의된다. 알려진 것처럼 루터는 자주 4차 Lateran Council에서 정죄된 essentia generat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기 원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논쟁에서 이 견해는 본질(the essence)은 essence를 통해서가 아니라(qua) 위격(person)을 통하여(qua) 출산되거나 존재가 된다라는 제한으로 완화된다. 이것은 위에서 인용한 논쟁의 기록에서 진술된다. 이 사실은 우리의 분석에 관계된다. 그것은 루터가 보통은 구별되는 위격들의 구성을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발현을 통한 세 가지 것들(tres res)로서 설명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특징들은 테제 14에 평행한데, 그것은 관계적 개념에 오직 제한된 삼위일체적 중요성만을 부여한다.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 안에서 관계들은 단순한 관계적 존재들보다 '더 깊은' 기초를 가진다. 루터는 이 '깊이'를 발현들에 대한 의지에 의하여 가장 분명히 한다. 여기에서 루터가 Ockham의 견해에 더 가까운가 혹은 Henry of Ghent, 혹은 Duns scotus 혹은 Bonaventure의 견해에 더 가까운가 라는 것은 확인될 수 없다. 또한 테제 14가 우리의 이해에 관한 원리로서 나타나는가 혹은 존재론적 진술로서 취해져야만 하는가 라는 것은 말하기 어렵다. 좌우간, 테제 14에서 루터는 관계들의 배타적인 우선성을 비난하고 발현들에 대한 프란시스칸의 강조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우리에게는 테제 17을 해석해야 하는 임무가 남아있다. 여기에서, 루터의 저작들의 많은 곳에서와 같이, 인간 이성의 가능성들에 대한 비판은 확실히 식별된다. 사실상 모든 중세 신학자들은 삼위일체가 인간 이성을 통하여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다라는 지적에는 동의하는 것처럼, 삼위일체적 신학에서 이것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덧붙여 테제 17이 테제 15와 16 사이의 부조화의 방법에 의하여 그 결론에 이르게 되고 그것에 의하여 테제 14에 포함된 경고를 일반화하는 것처럼, 여기에서 관계성에 대한 토마스주의의 이론에 대한 비판이 식별된다. 이 부조화는 Anselm적 규칙의 한계들과 해석적 원리로서 그것에 기초한 교회적 결정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