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법과 제도안에서의 경건
배 경 식 교수(한일장신대학교)
여는 말
칼빈의 경건에 관한 소논문은 한국 칼빈학회가 1998년에 펴낸「칼빈 신학 해설」에서 ‘칼빈의 경건’이라는 제목으로 이수영교수가 다루었다. 이교수는 먼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경건의 책으로 규정하면서 칼빈의 경건은 일차적 협의의 의미로 볼때 ‘하나님을 두려워함, 경외심, 순종과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칼빈의 경건을 예배와 기도, 지식에까지 연관을 갖는다고 보았는데 경건은 칼빈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유익들을 아는 데서 생겨나는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뜻한다.” 경건은 기독교 신앙 생활가운데에서 필요한 신앙적 행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교수는 칼빈이 말한 넓은 의미에서의 경건을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인간을 향한 의와 사랑’으로 도식화 하면서 이들을 각각 수직적 경건과 수평적 경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칼빈은 이를 경건과 믿음의 생활로 구분지어 말하고 있는데 믿음은 율법의 첫째 서판인 하나님과 율법을, 그리고 둘째 서판인 인간의 문제를 포함하는 것으로써 전자는 경건을 후자는 의와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경건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며 믿음의 행위가 경건을 이룬다는 말이 된다. 본 논문에서는 경건이란 과연 무엇이며 성경을 경건의 책이라고 규정할 때 칼빈의 경건이 어떠한 경건으로 해석될 것인가를 살펴본 후 칼빈의 경건성을 그의 주저서인 기독교강요와 주석 책 등 에서 찾아보려한다.
1. 칼빈의 경건에 대한 문제 제기
칼빈이 제네바에서 23년간 파렐의 간청과 도움에 의해 종교개혁의 일을 단행할 때 처음 13년간은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으나 나머지 10년간은 승리의 시기를 맞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제네바 도시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성시(聖市)로 만들기 위해 그가 쏟은 정성과 심혈은 너무도 커서 칼빈이 죽을 때의 모습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병이 들었다’라고 까지 전해진다. 실제로 그는 위가 약해 하루에 한끼만 취했다고 한다. 종교개혁자요, 신학자, 성경주석가, 교회조직가, 설교자, 목회자인 칼빈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의 일은 힘들고 고독하고 어려운 길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종교개혁의 일을 해 낼 수 있었던 근본 힘은 어데서 왔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를 통해 주어진 개신교의 변증서이자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답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교리서인가 변증서인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들이 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활발하게 전개 하여 나갈 때 그의 사역을 통해 한 가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볼 것은 ‘1542년부터 1546년까지 법에 저촉되어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58명, 추방된 사람이 76명’이라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설교를 듣고 웃었다는 것으로 인해 처벌을 가했다는 것은 너무나 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칼빈이 개혁을 단행 할 때 제네바시에서는 자신들의 자제를 교회학교에 보내기를 꺼려하는 부모는 시민권을 박탈하였으며, 도박장은 폐쇄되고, 사교무도회는 엄금되고 그것을 위반하면 골패를 그 목에 걸고 거리로 다니면서 시민들의 구경거리로 삼았고 가장무도회에 갔던 사람은 성베드로 교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받았다. 사치한 화장을 시킨 미용사는 이틀 동안 감금당하고 간음한 자는 남녀 함께 형리에게 끌려 거리를 돌게 한 다음 시외로 추방을 시켰다.
칼빈의 이 준엄한 정치를 경건과 어떻게 연관을 지어 생각할 수 있으며 과연 이러한 정치가 종교개혁 속에 들어있는 경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반대파들로부터 많은 저항과 도전 그리고 심지어 죽음의 고비와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종교적으로는 신령파들(Spiritueles),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들 이었으나 더 유력한 적은 교리상의 반대자들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이들을 단호하게 법적용을 시켜 처단하였으며 국외로 추방을 시켜 버렸다.
칼빈의 개혁에 교리적으로 맞서 반대하던 대표적인 사람들은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 제롬 볼제크(Jerome Bolsec) 그리고 미카엘 세르베토(Michael Serveto, 1519-1553) 등이었다. 이들은 각각 성경의 정경성을 부분적으로 부정하거나 칼빈의 예정설에 반대 하다가 직분을 빼앗기고 추방당했으며 세르베토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죄에 저촉되어 1553년 화형에 처하게 되었다. 칼빈이 이렇게 법적용을 시키면서까지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은 그의 교육적인 배경과 회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 칼빈의 교육과 회심
칼빈은 원래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위해 1528년 올레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칼빈의 시편주해 서문에 의하면 “나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고 내 자신을 적응하려고 충실히 이러한 권유에 전념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비밀한 섭리로서 나를 다른 길로 방향을 돌리게 하셨다.”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이 어렸을 때는 신학을 하기를 원했으나 나중에는 법을 전공하여 부를 축적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하여 칼빈으로 하여금 법학을 전공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31년 아버지가 죽은 후 부르쥬(Bourges)대학으로 옮겨 그곳에서 볼마르(M. Wolmar, 1496-1561) 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후에 회심이라고 까지 부른다. 볼마르는 히브리, 헬라어 등 고전어 학자인 스위스 출신 루터파 교인으로서 칼빈에게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희랍어 성경을 읽게 하였고 그에게 종교개혁사상을 전수하였다. 칼빈의 회심은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법을 공부하다가 인문학으로 전환하여 고전어를 배우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종교개혁 사상에 접한 것을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사상적인 회심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칼빈의 회심의 시기와 성격에 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시편강해의 내용대로 돌연한 것이라는 설인데 그 시기는 대략 1527-28년(칼 홀) 혹은 1532-33년(A. 랑)이다. 둘째로 칼빈의 생애를 처음으로 기술한 베자의 설에 의해 그것은 수년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 시기는 대략 1528년부터 33년에 이르는 약 7년이라는 기간 동안 내적인 고투에서 된 것이라는 설이다. 마지막으로 베른레(Wernle)에 의한 제3의 해석인데 칼빈 자신의 저술이나 베자의 기록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신빙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없으므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나 그의 서신들 그리고 시편 주해에 산재해 있는 어귀들을 근거로 하여 회심의 시기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참 경건을 맛보고 회심이라는 단계를 거쳐 기독교에 전념하였다는 말이 된다. 회심에 관한 세 가지의 설 가운데 그의 시편주석에 근거하여 칼빈의 회심은 1532년 봄 세네카의 주석을 낸 이후인 1534년까지 갑작스러운 회심((sudden conversion)을 경험하였다고 보여 진다. “먼저 교황종교의 미신에 집착하여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돌연한 회심으로 연령에 비해 완고했던 나의 마음을 인도해 주셨다.”
세네카의 논문이 칼빈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국가의 복종이었는데 하나님 이외로부터 나오는 권력은 없으며 만물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고 하였다. 그는 군중을 본래 선동적이고 이성이나 분별력이 결핍되어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칼빈의 귀족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의 로마서 13:1절에 대한 주석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정치가들을 세상정부의 정의와 법질서를 위해 지명하셨다. 비록 전제적이며 불의한 권력은 규정된 정부는 아닐지라도 정부의 권리는 인류의 복지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다.”
칼빈이 자신의 회심을 방향전환 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칼빈의 회심은 그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학문과의 단절을 의미했으며 이제까지 그의 생의 목표로 삼았던 인문주의에서의 탈피를 말한다. 회심이후 그는 인간의 위대성에 근거하여 정립된 인문주의에 맞서서 인간의 죄악성과 하나님으로 부터의 소외를 부르짖게 되었다. 인문주의는 이제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지적인 수단에 불과하였다.
칼빈의 개혁사상은 1533년 10월에 행해진 자신의 부르쥬대학의 동기생이자 친구인 니콜라우스 콮(Nicholas Cop)의 파리대학의 학장 취임연설에서 보여 진다. 그 내용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루터적인 개혁자의 신앙에 가담하는 일종의 성명서이었다. 그는 신학을 기독교 철학으로 말하면서 마 5:3절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 오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복음에 헌신한 성도들을 박해하는 것은 이단적이라고 공개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콮의 연설은 칼빈에 의해 기초된 복음주의를 발표한 것이었으며 일대 파란을 일으켜 두 사람 모두 추방을 받아 피난을 가야 하는 대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의 복음주의란 가톨릭의 예전중심적인 제도적 신앙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1535년 바젤에 머물면서 기독교강요를 저술하게 되었다. 1536년에 라틴어로 간행된 기독교강요는 프랜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정문을 통해 프랑스 개혁의 목적과 성질 등을 변증적으로 보여주는 문서로써 율법과 신앙, 기도, 예전, 기독교의 자유에 관해 서술하였다. 칼빈은 죽기까지 이 책을 손질하였으며 1541년에는 두 세번 개정을 한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출간하였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여러 번 증보 보충되어 출간을 했다 하더라도 개신교를 조직적으로 핍박하던 16세기 프랑스라는 가톨릭 국가에서 기독교 강요의 근본 내용과 뜻이 변하지 않았다면 교리서라기보다는 변증적인 성격이 더 강했으리라는 판단이 든다.
3. 경건과 경건운동
경건을 의미하는 말인 라틴어 Pietas는 희랍어 Εὐσέβεια(행 3:12)나 영어 piety 그리고 독일어의 Frömmigkeit에 비해 매우 포괄적이고 폭넓게 사용되는 말이다. 경건이란 어떤 일을 해내야 된다는 의무감(Dutifulness)이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Patriotism), 인간의 자질을 존경하는 마음(Respect for human qualities) 그리고 신들로부터 오는 연민의 정(The compassion from the gods)을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경건이란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어진 이유는 “국가는 세상의 법을, 교회는 하나님의 법을 수행하는 기관”이라고 이해되고 있을 때 교회가 세상의 법을 지배한다는 논리에서 이 말이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의 경건 혹은 가톨릭적인 경건이라 부른다.
이에 반하여 좁은 의미에서의 경건 즉 개신교의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내적인 태도와 구체적인 삶을 말한다. 경건이라는 말은 종교심리학에서 매우 중요한말로 인간의 감정과 정서적 생활 그리고 예배와 신앙적 삶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 말이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건이란 말을 조심스러우면서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 일까? 이 말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꼭 필요할까? 우리의 삶에 이 말이 필요하다면 어데까지 적용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은 한 번쯤 제기해 볼 만하다.
우리가 흔히들 “진실한 철학자는 경건한자(者)”라든가 유대종교에서 율법과 하나님을 높이는 것,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나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주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는 것’(Gott-ehren) 그리고 ‘그를 섬기는 것’(Ihm-dienen)이 경건의 생활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폭넓은 의미를 갖는 경건(Piety)이란 말이 한국교회에서는 거룩(Holiness)이란 말과 함께 보수신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기에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은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가령 어떠한 사람이 경건하다고 하면 '신앙심은 있으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 뭔가 세상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되기까지 하여왔다. 이러한 현상이 기독교내에 까지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우리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이며 불교적이며 무속 신앙적인 영성”에 기인한다고 보여 진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적으로 경건하다”라고 하면 찬송, 성경을 옆에 끼고 교회에 가는 것만을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 전개되는 일들은 무슨 행동을 하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신앙적인 태도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용어인 “경건”(Piety)을 매우 잘못 이해 한 것에 연유한다.
필자는 「경건과 신앙」이라는 책을 통하여 경건운동이 독일의 개신교인들에게서 왜 일어났는가를 역사적으로 바르게 인식하고 경건을 경건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와 신앙 그리고 신학을 살펴본 적이 있다. 아울러 한국교회의 신앙적인 유산에서 보여지는 경건운동을 칼빈의 경건과 비교하여 보면서 논리를 전개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경건이라는 말을 대표하는 성경구절은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야고보서 1: 27절인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이니라”이다. 경건은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함은 물론 사회적인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신앙실천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경건은 경건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적으로 볼 때 경건이란 말은 신학적으로는 개신교 정통교회로부터 비판을 받아온 말 중의 하나이다. 가장 큰 이유로는 정통주의 교회 내에서 신앙의 경건 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신앙개혁운동이 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의 공적예배 이외에 별도로 모여서 성경의 내용들을 묵상하며 신앙 서적들을 읽고 토론하고 자작시들로 쓰여 진 영적인 노래들을 불렀다. 그리고 주일에는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찾아간다든지 병자들을 심방하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별도의 모임들을 신앙을 사변적이며 철학적으로 교리화 시킨 정통주의자들이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이들의 모임을 “교회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라고 불렀다. 이러한 교회의 특성을 가진 경건운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이다. 슈페너가 이끌던 영성계발을 위한 사적인 모임인 “경건의 모임”(Collegia pietatis)이 1670년 평신도들의 제안에 의해 만들어 졌을 때 이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전 주일의 설교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한 질의나 응답을 주고받거나 성경을 읽으며 성경 내용에 대한 토론을 하였고 주일날은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권면하고 환자들을 심방하는 등 경건운동을 신앙공동체로 형성하여 나갔다.
이때 나온 것이 슈페너의 「경건한 요망」(Pia desideria)이라는 소책자이다. 그는 이것을 1675년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복음서 강해(설교집, 1615/16) 신판의 서문으로 헌정하였다. 이것의 부제목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개혁을 위한 참된 복음주의 교회의 경건한 소원”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교회와 사회에 대한 진단과 비판, 나아가서는 처방과 개혁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서론부분에서 그는 당시의 사회와 교회를 심각하게 진단하고 비판하면서 구체적인 교회와 사회 그리고 신학의 개혁안을 내어 놓게 된다: “우리들이 탄식하는 바의 비참한 형편들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눈물 흘리는 것을 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과 질병을 보게 될 때 치료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영적 몸이 지금 고통과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우리들은 모두 몸의 지체들이므로 몸 안에 있는 괴로움을 우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치료에 필요한 약을 구하여 처방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다.”그는 당시의 교회가 세 가지 면에서 병들었다고 한다. 그 첫째가 교회의 지도자들이다. 주교와 감독, 수도원장, 기독교의 기관들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설교자들이다. 목회를 담당하고 있는 설교자들의 영적능력을 상실했다는 말이다. 셋째는 평신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들에게 진실한 살아있는 신앙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슈페너는 기독교적인 모임이나 행사가 신앙을 주제로 하는 대화나 경건한 공동체를 유지하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분수에 넘치는 교제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교회를 진단하는 예언자적인 의사가 되어 중병에 걸린 교회를 치유하는 여섯 가지 개혁안을 내어 놓게 된 것이다.
1) 더 많은 성경공부와 신앙에 대한 공동대화 그리고 기도의 생활이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본문을 읽고 다른 사람의 해석방법에 의한 설교를 듣는 것으로 영적인 신앙생활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더 분명하게 읽고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신앙인들의 일반 제사장직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영적 제사장직을 실현함으로써 교인들 상호간에 피차 신앙의 감독과 권면을 하는 신앙의 유대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3) 실천적 삶의 강조이다. 기독교인들은 단순한 교리적인 내용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으며 신앙생활의 전적인 체험이 삶 전체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4) 불신자들과 이단자들에 대한 종교적 논쟁을 줄이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교리 적인 정죄는 복음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확고한 진리를 제시할 뿐 아니라 풍부한 말씀과 성례전의 집행에 근거한 사랑의 실천과 권면에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5) 신학연구를 위한 개혁이다. 목회자의 훈련은 논리적인 정통신학을 넘어서서 “경건한 실천”(Praxis pietatis)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6) 설교는 내적인 인간을 교화시키며 그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설교의 내용은 실제생활과 거리가 먼 교리나 강론 그리고 지식인들을 위한 논리 전개에서 벗어나 신자들을 교육시키고 교화 양육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묻고 싶은 것은 이러한 슈페너의 비판적이며 예언적인 사상이 누구의 영향하에서 왔는가 라는 물음이다. 필자가 연구한 바대로는 슈페너가 학문 연구여행을 갔을 때인 1662년 튀빙엔 대학에서 읽은 테오필리 그로스게바우어(Theophili Großgebauer)의 「황폐된 시온에서의 파수군의 소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재편집한 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그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강력한 회개를 촉구한다. “육체적인 지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느리라(롬 8:7)”라는 전제하에 그는 성경을 신구약성경에서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신앙고백적인 글을 써 나간다. 그는 이책의 부제목을 “이것은 신실하고 꼭 필요한 발견이다. 개신교회가 회개를 거의 외치지 않는 것과 하나님 없음을 두려워하며 왜 개신교교회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영의 말씀을 설교함에 있어서 비 영적이며 하나님 없는 것처럼 되어 갈까?”라고 칭하였다.
4. 경건과 경건한 삶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경건이라는 말은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가치를 지니는 매우 중요한 말 중의 하나이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을 너희는 알지어다”(시 4:3)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과 교제하기 위해 경건한 자들을 선택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시고 일을 하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들 가운데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그리고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다윗, 엘리야, 엘리사 등등 수없이 많다.
신약성경에서 경건한 사람이라면 시므온과 안나(눅 2:25-38)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기거하면서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렸다. 이들이 경건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었으며 성전에 거하면서 주야에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섬길 수 있었다. 하나님의 택정함과 인정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도들의 구원과 위로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들임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예이기도 하다.
칼빈은 경건성을 율법의 서판에 기록된, 하나님과 인간, 이 두 부분가운데 전자에 연결을 시키면서 경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어진 회복에 근거한 신앙으로 이해하였다: “경건성과 의로움은 율법의 두 서판들과 연관이 있다: 삶의 성실함도 이러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가 경건하다는 증거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없이는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 구원은 그의 약속과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어진 회복 안에 있는 신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시므온의 경건은 그의 영혼이 약속된 구원을 기대하는 가운데 더 강해 졌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원하는 사람들은 약속된 구원을 위한 끝없는 탄식을 해야 하며. 견딤은 그리스도의 오심의 마지막까지 요구된다.
가이사랴의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 역시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더니”(행 10:1-2)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것은 경건성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의 열매와 증거들이다”라고 하였다. 이말은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기도에 항상 힘썼다는 말이다.
칼빈은 고넬료의 경건성의 원천을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두었다. 고넬료는 율법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다. 율법의 첫번째 부분은 고넬료의 경건에서 충족되었으며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비로운 행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성경은 경건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그렇다면 경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와 경건한 신앙생활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이다. 이러한 말은 종교개혁자들이나 경건운동가들에 의해 실제적으로 보여 진다. 경건이란 좁은 의미에서의 영성이다. 영성은 여러 사람들의 연구에 의하면 헌신(Devotion)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헌신이란 자신을 드릴 수 있는 대상에게 온전히 드리는 것, 내적인 사랑을 갖는 것, 신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가는 것 등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써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존경이 결합된 것이 칼빈이 이해한 경건이라면 인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부성적인 돌보심에 의해 양육되고 하나님이 모든 축복의 창조주이시며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 안에 완전한 행복을 두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진실하고 경건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한국문화와 기독교의 접촉에서 일어난 반응을 적응형, 충돌형, 몰입형의 세 가지로 분류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으로 본다. "기독교와 함께 들어온 물질문화는 '적응'하였고, 행동 문화는 충돌하였으며, 정신문화 특히 기독교의 가치관은 도리어 한국문화에 몰입되어 갔다는 것이다."우리가 이런 전제를 가지고 다룰 독일에서의 경건운동은 교회적으로 볼 때 제2의 종교 개혁운동이자 개 개인의 신앙 각성운동이다. 이 운동은 개인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남아 주님의 몸된 교회를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가 되게 했으며 교육과 의료 그리고 선교를 통한 신앙과 교회 그리고 사회적인 개혁을 가져오게 하였다.경건이라고 하면 먼저 독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독일의 경건주의는 경건의 운동으로서 경건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시간 이외의 가정 모임들, 문서 활동, 복음적 찬양, 신앙과 교육 선교의 실천등을 이 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경건운동은 독일 경건주의에서 보여지는 경건운동과 접목시켜 이론과 실천적인 접목을 시켜 볼 가치와 필요가 있다.
5. 칼빈의 경건운동
1) 정치 제도적 경건
제네바의 정치적 상황은 1530년 이후 사보아제후의 권력이 약화되면서부터 시민의 권리가 증진되었으며 시의 모든 정치는 평의회라는 소회의와 2백인 회의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시민총회를 통해 이루어 졌다. 1532년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제네바에서 면죄부를 판매하면서부터 민심이 크게 들끓게 되었고 개혁의 물결이 넘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한동안 완강한 가톨릭 세력의 저항에 의해 개혁당의 지도자 파렐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으나 1535년 8월 베른(Bern) 지역의 정치적인 협조와 프론만(Proment)과 뷔레(Viret)의 도움으로 개혁사업이 성공하여 그때부터 제네바 시에서는 미사를 금하는 개신교도시가 되었다.
칼빈은 파렐을 돕는 위치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우선적으로 시작하였다. 성경에 근거한 도시 건설을 시도하였다. 시정부는 종교개혁을 허락하였으나 시민들은 여전히 타성에 젖어 옛 종교적 관습과 생활방식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제네바의 혼란상황에 직면하여 개혁의 과제를 설정한 것은 1536년 11월 의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조직에 관한 조항과 신앙지침서 그리고 신앙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종교개혁을 위한 제안들로는 성만찬의 매월 거행, 출교의 강화 및 감독관 임명, 신앙고백의무, 시편찬양, 신앙 교리교육, 혼인업무 이관 등 이었는데 가톨릭 신앙에 깊이 뿌리를 내린 시민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1938년 4월 리브(Rive)교회에서 부활절을 맞아 저녁 설교를 마친 이후 2백인 회의와 시민총회에서 파렐과 칼빈 두 사람을 시외로 추방을 시켜버렸다. 칼빈은 그 후 3년간 슈트라스부르크에 머물면서 성경의 주석을 저술하고 「기독교강요」를 증보하였다. 칼빈과 파렐이 추방을 당한 이후 슈트라스부르크는 종교적으로 혼란을 거듭하다가 1540년 9월 다시 이들을 초청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네바의 개혁운동이 시작 된 것이다.
칼빈의 종교개혁운동은 경건운동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의 기본서이자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에 분명히 자신의 경건을 추구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거론한 바대로 왜 단호한 정치 물리적인 힘으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이자 경건운동을 해 나갔는가라는 문제이다. 이에는 법과 제도적인 근거가 있다.
칼빈의 정치사상은 개신교가 일찍 뿌리를 내린 스코트랜드나 네델란드 그리고 유럽의 근대국가들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 잘 알려진 견해이다. 그의 정치사상은 「기독교 강요」 제 3권 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제 4권 20장 ‘국가 통치’에 자세히 다루어져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그의 정치사상을 살펴보려 한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이중적 통치인 두개의 정부가 있다(duplex in homine regimen). 영적인 정부와 시민정부이다. 영적인 통치와 국가의 통치라고도 번역이 된다. 전자는 “경건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에서 양심이 훈련을 받는 곳이며, 후자는 정치적인 것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인간성과 시민 됨의 의무를 위해 교육을 받는 곳이다.” 이 두 가지의 측면을 영적 및 세속적인 통치권이라 부른다.
영적인 통치와 국가의 통치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전자는 이 땅에 있는 우리 속에서 하늘나라를 시작하였고 영원토록 썩지 않을 미래의 복락을 예고하고 있으며 후자는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경건의 도리와 교회의 지위를 변호하고 사회에 적응시키며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칼빈이 양심(conscience)을 영적 정부에서 인간의 표준으로 삼은 것은 양심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바울이나 베드로도 양심을 그렇게 이해했다고 주장한다(양심의 증거, 롬 2:15-16, 선한 양심, 벧전 3:21). 그는 딤전 1:5의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예로 들면서 양심이란 지성(intellect)과는 전혀 다르다고 한다. 칼빈에 있어서 양심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살아있는 성향이며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살기를 바라는 순전한 열심이기에 양심의 자유를 말한다.
우상의 제물을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심의 자유가 있기에 그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청결케 하는 것, 정욕을 제하는 것 그리고 모든 음란과 더러운 말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세우는 것은 물론 양심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의미상으로 볼 때 영적인 통치는 영적인 생활에 관한 것이요, 세속적 통치는 현실생활에 관한 것인데 먹고 입는 것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고결하고 절제 있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에 관한 통치를 인간의 양심이 대변한다는 것이다.
두 세계에는 각기 다른 왕과 법률이 권위를 행사한다. 그러나 이 둘이 철저히 구별되어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외적인 통치인 인간사회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며 영적으로 자유스럽다고 해서 모든 육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 개의 정부 이론은 사상적으로 세네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의 공화국은 법과 정치적인 시민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 존재들로 구성된 사회로서 도덕적, 종교적 사회라고 보았다. 깔뱅은 이 두개의 정부가 궁극적으로는 왕의 왕인 하나님께 속한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 두개의 정부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칼빈이 배격하는 시민정부 형태에 관한 두 가지의 다른 입장은 재세례파와 마키아벨리적 입장이다. 전자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절대시하며 자신들의 양심을 속박하는 어떠한 법적인 제도나 규정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를 전복하려 하는 이상적인 세계관을 갖던 그룹이었으며 후자는 제후들에게 아첨하며 절대 권력을 만들어 감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와 대립시키려는 것을 말한다. 칼빈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국가 사회와 공동체를 저해시키는 해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는 모두 하나님께 속하며 서로 다른 사명이 있음을 말한다.
영적 통치는 지상에 있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시작하게 하며, 죽을 수밖에 없고 허무한 이 생명 속에서 영원히 썩지 않을 축복을 예지하도록 한다. 국가 통치의 우선적인 직무는 정의의 실현이다(롬 13:1-4). 정부의 공무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로 인도되어야 한다. 국가통치의 목적은 하나님께 향한 외적인 예배를 보호하며 교회의 경건한 교리와 지위를 보호하며 우리의 생활을 사회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정의와 일치하도록 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여 전체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칼빈에게서 남는 하나의 물음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theocracy)를 했느냐 라는 것이다. 이 말이 성직자 통치(hierocracy)나 성서적 통치(Bibliocracy)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칼빈의 신정정치는 불가능했다. 그 이유로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관리와 성직자를 구분했으며 그가 말한 것은 각 민족에게 그 민족에게 유익되는 법률을 만들 자유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1535년 독일 뮨스터를 장악하고 구약의 제도를 모방한 신정사회를 건설하려던 재세레파의 참사를 경험한 칼빈은 구약의 사법적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려던 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칼빈의 통치는 그리스도 통치(Christocracy)이다. 육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육체 밖에 있는 그리스도는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활동과 창조활동을 말한다. 칼빈의 정치적 이상은 성직자가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설교와 교육을 통해 훌륭한 정치가를 길러 내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따른 훌륭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회는 성서의 사법적 규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은총에 속하는 지성과 양심에 의한 사회였다.
칼빈이 제네바 개혁운동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은 정교일치의 도시건설이었다. 교회의 정치화(Politisierung der Kirche) 내지는 정치의 기독교화(Christianisierung der Politik)라고 할 수 있다. 이일을 이루기 위해 제일먼저 한 것은 소의회를 통해 교회법(Ordonnances)을 기초하여 2백인 회의의 의결을 거쳐 법률로 정하였다. 이 법률에 의한 교회정치는 거의 사도시대의 것과 같았다. 감독이 없었으며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순수한 교회조직 그 자체이었다. 교회의 직원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종류로서 설교를 맡은 목사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목사는 목사회의에서 선정하고 시의회의 의결을 거쳐 교회의 동의를 얻어 확정하였다. 장로는 정치를 맡고 집사는 회계와 자선사업을 관장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장로교회의 정치 규범이 되고 있는 제도이다.
제네바에서는 시민전부가 교회회원이 되며 신앙고백에 동의 할 것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어린아이를 위해서는 간단한 신앙 문답서를 외우고 배우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제네바시는 그 자체가 교회가 되도록 하였다. 시의 풍습과 도덕을 개신교 신앙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평의회를 조직 하였는데 이 회의는 목사 5인과 장로 12인으로 구성하였다. 이 회의는 매주 1회 회집하여 교회의 규율과 시민의 도덕을 관리하였다. 칼빈은 이 평의회의 일원이었으나 설교자와 성경해석자로서 특별한 권위를 가져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당시 제네바의 풍습은 극도의 피폐상황에 이르렀다. 평의회는 규율을 정하는고 시행하는 데 매우 준엄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음주, 무도, 사치, 외설, 비속한 노래 등이 모두 금기 사항이었다. 평의회는 이러한 범죄 행위를 행하는 자들을 교회로부터 추방하고 일반법정에서 그 밖의 형벌을 관장하였으나 실제로는 평의회의 정하는 바를 그대로 준수하였다.
칼빈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설교가, 주석가, 신학자, 문필가, 법률가 정도로 말하고 있으나 그의 개혁의 전 과정을 보면 교회와 사회의 정치가로서 제네바시를 23년 동안 전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을 위해 1537년 1월 제네바시의 소의회와 2백인 회의를 통해 교회의 정치기구를 채택한 후 신앙요리문답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에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여 배우기로 서약하고 아이들까지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물론 거기에는 반대파들이 있어서 심지어 칼빈을 아리우스파로 정죄하기도 하였다.
시정부와의 충돌은 교직자들이 성경만 전하지 왜 정치에 관여하는 가라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한 표현으로 과격파들은 습격을 한다던지 투석하고 협박까지 하였다. 이러한 일로 인해 결국 시의회는 가결에 의해 칼빈과 파렐을 제네바로부터 추방을 시켜 버렸다.
개혁을 시도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온 칼빈은 부처(M. Bucer)의 도움을 받으며 프랑스 이민교회를 섬기면서 저술과 신학연구에 전념하였다 1539년 기독교강요 제 2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도 출판하였다.
제네바는 날로 부패하여 갔으며 반대파 세력의 약화로 인해 칼빈이 다시 재 초청되었다. 칼빈은 이러한 재 초청에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파렐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 1541년 9월 제네바에 들어가 1564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간 개혁운동가로서 일생을 마쳤다.
1541년부터 시작된 그의 개혁운동은 처음 13년간은 고전의 시기이었다. 나중 9년은 승리의 시기를 맞게 되었는데 3세기까지의 교부들의 글을 사랑하고 그것에 근거한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제네바에서는 시민전부가 교인이 되어 신앙고백에 동의하게 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은 문답서를 배우게 하였다. 이와 같이 시 전체가 교회가 된 것이다. 도시의 교회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목사 5인과 장로 12인으로 구성한 평의회를 조직하여 교회의 규율과 시민의 도덕을 관리하였다. 평의회는 규율을 정하여 제네바 시민으로 하여금 음주와 무도, 사치, 외설, 저속한 노래 등을 금하였다. 칼빈은 이 회의에서 성경해석자로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다.
2) 교회 제도적 경건
칼빈의 신학과 신앙운동에서 특이한 것은 기독교적 삶이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청지기직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저술한 기독교강요의 내용은 서론 부분이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정의 말씀으로서 기독교 변증서라는 점과 그가 다룬 내용들은 거의 모두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청지기직을 행할 것인가를 사도신경에 비추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그리고 교회를 각 권에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신앙운동은 종교개혁 이후 국가와 종교의 영역이 구분됨으로써 교회의 역할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어 병약자, 빈민자 구제 등의 사회복지 사업이 주된 것이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자기 자신을 부인함’으로 규정하면서 이웃사랑의 실천은 행위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사랑의 마음에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의 불행을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안타깝게 여길 때에 마치 자기에게 하 듯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신앙적인 가치관은 자기의 유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열심히 추구는 데 있다. 이일은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하며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은 사랑의 실천과 정의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산상수훈적인 삶이다. 그곳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는”(마 7:12) 윤리관이라 할 수 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며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는 삶”(마 5:39-42)을 말한다. 이러한 삶이 가능한 것은 예수의 “무엇 무엇을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Ήκούσατε ὅτι έρρέθη, έγω δὲ λἐγω ὑμίν)를 든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는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통일적인 것과 다원적인 것, 구심적인 것과 원심적인 것, 미사주의와 설교주의, 사제주의와 예언자의 종교 등으로서 역사적 변천에 따라 기독교의 이중구조를 갖게 하였다.라는 예수의 말씀에 결단을 보일 때이다. 신앙 안에서 보여지는 새로운 삶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디도서 2장의 교훈’을 통해 우리의 삶에 속한 모든 행동들을 ‘신중함’과 ‘의로움’ 그리고 ‘경건함’으로 구분하였다. 신중함은 순결함과 절제 그리고 세상의 제물을 검소하게 사용하며 인내로 궁핍함을 끝까지 견디는 것까지 포함한다. 의로움은 각 사람을 합당한대로 대하는 공평의 의무를 다 포괄하며 경건함은 세상의 부패 상태에서 우리를 구별시키며 또한 참된 거룩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중세 카톨릭은 자신들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전승(Tradition)에다 가두어 버린 것이라면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교회의 전승을 재해석하고 그 속에서 새롭고 놀라운 진리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의 발견이기도 하다.
교회 안에서는 오직 주께서 최고의 권위와 자리를 차지하셔야 하고 그분이 다스리시고 통치 하셔야 한다. 그리고 그 권위는 오직 그 말씀으로 시행되고 운영된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눈에 보이는 상태로 임재하시지 않기 때문에(마 26:11) 자신의 사역의 대리자인 직임자를 교회에 세우셔서 운영하신다.
칼빈은 1541년 11월에 ‘교회에 관한 칙령’(Ecclesiastical Ordinances)을 목회적 기능의 견지에서 작성하여 법으로 통과하였다. 교회는 목사와 교사, 장로와 집사의 4가지 직분을 가진다. 교회의 임무는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성도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며 고통당하는 자를 보살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도움이나 도구, 예를 들면 천사들을 이용하시지 않고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며 그것이 겸손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연약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에 그 사람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받는 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연약한 질 그릇 속에 감추어 두신 것과 같다(고후 4:7).
더 나아가서 한 사람이 가르치고 다른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이러한 사랑의 끈으로 사랑을 증진시킨다면 연합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며 이것을 끈으로 삼아 구원과 영생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위탁하셔서 교회 안에서 가르치도록 했다고 한다.
칼빈은 엡 4:11과 롬 12:7-8을 근거로 하여 교회 안에 여러 가지의 직분이 있음을 말한다.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이다. 이 가운데 끝의 둘만이 교회 내의 정상적인 직분이고 처음 셋은 필요에 따라 부활시키신 특별 직이다. 신약성서는 장로와 집사를 언급한다. 결국 목사와 교사, 장로와 집사의 4직제가 되는 데 제네바에서 칼빈은 교사인 박사의 직을 두지 않았다. 자신이 성경교사로 시작하였는데 목사가 박사의 기능을 포함했다고 보여 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볼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주교와 집사 부집사를 두어 상하 질서를 두었는데 칼빈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주님을 봉사하는 기능적 관계로 이해 한 점이다. 이는 초대교회의 은사 중심적 교회의 건립이라고 볼 수 있다.
① 사도들과 목사들
사도들은 교회의 창설자로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이다. 선지자는 어떤 특별한 계시의 은사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는 거의 없다. 복음전하는 자는 전도자로서 사도들보다는 직분이 낮으나 그들 다음으로 활동한 사람들이다. 누가, 디모데, 디도 등과 같은 전도자들로서 70인의 제자들도 전도인들 이었다(눅 10:1).
목사와 교사가 없이는 교회를 유지할 수 없다. 교사들은 성경 해석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그 이외에 제자 훈련이나 성례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하는 일은 목사가 전담하였다. 전도자와 사도를 함께 보면 서로 상응하는 두 쌍을 보게 된다. 교사들은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생명이며 지혜의 근원인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교회에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사역을 교회에 부여 하셨다. 이 말씀 사역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교회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중요한 직무이므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목사에게 소명감과 능력을 주신다. 목사는 성경과 일심동체가 되어야 하며 최대의 경외심을 가지고 성경을 다루어야 한다.
선지자의 직분은 그 탁월한 계시의 은사 때문에 두드러졌으며 교사의 직분도 성격이나 목적에 있어서 비슷하다. 사도들은 특별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의 사명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였다. 목사들은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도들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하여 교회에 직제를 두셨다. 이 권위는 오직 그의 말씀에 의해 행사되어져야 한다.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을 이루시려하신다. 이는 마치 노동자가 연장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무의 도움이 없이 친히 일하실 수도 있고 천사들을 시켜서 일하실 수 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인간의 사역은 신자들을 묶어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과 같다고 한다. 인간의 사역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중요한 힘이 된다. 교회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안전하게 유지하기만 하면 교회가 온전히 지켜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축복의 참여자가 되는 것은 복음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게으른 우리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생기게 하고 증대시키고 그 목표에 이르도록 하기위한 외적인 장치가 교회이다. 교회 속에 있는 이 보물을 “그들의 입술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려고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셨고(엡 4:11)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으며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목사의 주된 기능은 복음을 전하며 권징(치리)과 성례를 담당하는 것이었는데 초대교회의 계승자이다. 감독이나 장로의 칭호를 갖기도 하였다.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 복음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라고 하셨다(마 28:19). 바울은 목사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일꾼,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라고 한다. 감독에 대하여는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리는 자를 책망한다(딛 1:9)라고 하고 있다. 목사의 직은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특수한 기능이 있다. 교회를 다스리고 돌보는 일을 위해 목사가 세워지며 목사는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부름을 받는다.
목사는 가르치는 자질도 있어야 하며 권징의 실시에도 관여하고 고통당하는 자를 돌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본질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권징의 실행을 돕는 것이다. 목사는 의회에서 성직 취임 면허증(certificate)을 받으며 자신이 하나님을 충실히 섬길 것과 교회에 관한 칙령을 지키고 충성할 것과 정부와 시의 명예를 드높일 것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제네바의 법을 준수할 것을 맹세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에게, 교회는 어머니라고 까지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기뻐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에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되도록 하기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이 성숙하여 신앙의 목표에 이를 때까지 어머니와 같은 사랑에 의해 인도함을 받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 사함의 용서와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정적인 제도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로서 피차에 도움을 주는 신앙 공동체이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숨겨진 선택에 있으며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말하려 하고 있다.
교회란 결코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하여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이나 경건한 공동체라고만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며 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들이 올바르게 시행되는 것에 있다. 말씀과 성례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교회의 특색을 나타내 보이는 표지이다. 이러한 표지가 있는 교회는 아무리 불완전하고 허물이 있다 하다 하더라도 버려서는 안된다. 참된 교회와 거짓교회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에 의해 구분된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교제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세우신 그리스도의 대리직이 사도들과 목사들이다.
목사의 직은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독특한 사역이나 사도들의 사역에 필적하는 직분으로 교회에 부여하신 것이다. 목사가 신자들을 가르치고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공통된 교리를 받아들일 때는 목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통해 신자들이 연합하여 서로 사랑을 베풀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간주 할 수 있다.
목사는 백성에게 순수한 교훈을 가르치며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 외에 또한 성결한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의 훈련과 질서를 멸시하는 자들은 이단자와 같으며 교회는 목사 없이 존립할 수 없고 교회를 통한 경건훈련이 신앙에 필수임을 인식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해 파송된 목사에 대한 복종은 곧 그를 파송한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대언자이다.
목사에 포함 할 수 있는 교사의 임무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일과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일을 하였다. 참된 교리를 가르치고 오류를 몰아내는 것이다. 교사의 임무는 언제나 성경의 율법에 따라 목사의 설교를 평가하고 목사 후보생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구약을 주해하고 신학을 주해하는 2명의 교사가 있어야 했다. 신학의 보조 학문인 언어학과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한 남학교와 별도의 여학교에 교사와 보조 교사가 임명되어야 했다.
② 장로와 감독
가르치며 다스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장로(πρεσβυτέριον)는 감독, 장로, 목사, 사역자라고 불리 우기도 한다. 칼빈은 딛1:5와 1:7, 행 20:17과 20:28을 근거로 하여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책임을 주장한다. 다스리는 사람들은 신자들 사이에서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고전 12:2) 각 도시에서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 불렀다. 이는 계급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화를 막기 위함이었다. 장로들은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행하는 일들을 맡았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롬 12:8)을 말한다. 처음부터 각 교회에는 경건하고 위엄 있고 성결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과오를 시정하는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직분은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
감독과 장로들은 말씀 선포와 성례전 집행에 전력을 다했다. 장로가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된 것은 아리우스의 논쟁이 있은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건전한 교리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감독의 일차적인 의무라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 오래 지속된 원칙이다.
③ 집사
선출에 의해 임명되는 집사들은 우선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일이 맡겨졌다. 구제하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을 했다(롬 12:8). 이를 볼 때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다(딤전 5:9-10). 교회의 구제 사업을 관리(administrative)하고 조직하며 봉사하는 집사들과 직접 환자와 빈민을 돌보는 실행(executive)집사들이다. 전자는 관리인(guardians) 즉 소위 구호 감독관 의 역할을 하였으며 후자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병원에 환자들을 위문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집사라는 말에서 나온 기독교사회봉사(διακονία)는 더 넓은 뜻을 가지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교회로부터 맡은 사람들이다.
누가가 이들의 기원과 임명 그리고 직분에 대하여 사도행전에 기록하였다(행 6:3).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제외된다는 소식을 듣고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위해 정직한 사람 일곱 명을 택하여 이일을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부탁을 하였다. 칼빈은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사도들의 교회에 있었고 우리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칼빈이 일하던 제네바는 두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구제품을 분배하는 집사와 병자들을 돌보는 집사들이었다.
칼빈 자신이 제네바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시도한 것은 항구적으로 보다 나은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개혁되어진 교회는 개혁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것이 칼빈 신학전통의 입장이다. 칼빈은 교회 뿐 아니라 세계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좋게 변화되기를 원했다. 사회윤리로서 칼빈의 윤리는 개인의 도덕에 근거하여 인간적이며 세계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개인이나 교회 뿐 아니라 피조물의 세계전체가 변화되어 보다 나은 세계로 개혁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결언
칼빈의 경건은 경건한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어 아버지의 신학 교육을 시키려던 그 열성과 부르쥬 대학에서의 볼마르 교수의 개혁신앙적인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교육 여정은 신학과 법학 그리고 인문주의 교육이었는데 종교개혁을 하던 제네바시에서 그는 자신이 배운 학문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역량을 힘껏 발휘하였다.
파렐의 초청과 강권적인 권유에 의해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 그를 억압하는 정치 세력의 반발은 매우 거세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베른이라는 이웃도시의 지원 여하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종교개혁은 정치적인 것이 더 강했다. 시정부가 종교개혁을 시정부가 종교개혁을 허락하였으나 시민들은 과거의 전통과 타성에 젖어 예종교적 관습과 생활방식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거센 저항에 부딪쳐 개혁을 중단하고 그곳에서 쫓겨나 한동안 슈트라스부르크로 피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개혁의 기회가 주어져 23년 동안 제네바시를 개혁적 성향을 갖는 도시로 바꾸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칼빈 당시 제네바시의 교회들은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외적으로는 가톨릭교회의 박해와 탄압에 투쟁하고 내적으로는 복음을 훼손하는 온갖 사상들과 대립해야 했다. 칼빈은 교회의 일치와 영원성 그리고 확실성을 강조하면서 마 18장에 근거한 출교를 실천하였다. 출교는 본래 주가 제정하신 것 중에서 구원을 위해 유익한 일로 여겼다.
칼빈에게서 보여 지는 두 개의 정부는 영적인 정부와 시민정부이다. 전자는 양심이 후자는 법률이 각기 그 정부를 지배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칼빈이 배격하는 다른 시민정부로서는 재세례파와 마키아벨리적인 입장이다. 전자는 신앙양심을 절대시하고 앞세우면서 어떠한 법적인 제도나 규정을 무시하며 후자는 제후들에게 아부하면서 까지 절대 권력을 만들어 내는 태도이다. 칼빈은 이러한 것들 모두를 개혁의 큰 장애물들로 여겼다.
경건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내적인 태도와 구체적인 삶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조국을 사랑하는 의무감이나 높은 사람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신들로부터 오는 연민의 정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렇게 보면 경건이라는 말은 원래 법적인 용어중의 하나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 이성이 인간과 사회에 대해 좀 더 깊고 근본적인 지식을 획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 본성의 궁극적인 정체를 인간에게 알려줄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이 할 수 있었던 원래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없다. 마로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의 복음주의의 근거가 되는 소위 급진적 비관주의를 만나게 된다.”
칼빈은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갑작스러운 회심의 경험을 통해 계시의 말씀인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기도 하다. 성경을 통해 구원의 확신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경건에 근본을 두면서도 그의 경건은 개인적 경건이라기보다는 제도적 경건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당시의 제네바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정치 제도적 경건으로 제네바시를 교회화 하였으며 교회 제도적 경건으로 교회를 정치화 내지는 사회화 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와 기독교적 삶이며, 교회와 기독교적 삶이다. 기독교적 삶을 교회와 사회에 연결시킨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1535년 재세례파의 뮨스터 사건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그리스도 통치(Christocracy)라고 대답할 수 있다. 육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그리고 육체 밖에 있는 그리스도는 온 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창조사역을 그리스도의 통치로 이해하였다. 그는 이런 면에서 제네바시를 개혁 할 때 설교와 성경 그리고 교리교육을 중요시하였으며 훌륭한 정치가를 길러 내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사회는 일반 은총에 속하는 지성과 양심에 의한 사회이었다.
교회의 직임과 봉사의 사역들로는 엡 4:11과 롬 12:7-8을 근거로 하여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이다. 이 가운데 끝의 둘만이 교회 내의 정상적인 직분이고 처음 셋은 필요에 따라 부활시키신 특별 직 들이다. 교회는 이런 면에서 예배와 교육의 장이다. 그 이외에 제자 훈련이나 성례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하는 일은 목사가 전담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하여 교회에 직제를 두셨다. 이 권위는 오직 그의 말씀에 의해 행사되어져야 한다. 연약한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말씀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랑의 띠를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공동체가 가진 특권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을 이루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의 도움이 없이 친히 일하실 수도 있고 천사들을 시켜서 일하실 수 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사도와 목사들은 복음 전파와 성례전의 거행을 그리고 장로와 감독은 가르치며 다스리시는 일을 한다. 집사는 구제하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을 했다. 집사라는 말은 사회봉사자라는 더 넓은 뜻을 갖는데 오늘의 말로 구제와 사회적 약자를 돕는 다고 한다면 사회가 다양화 되고 전문적인 지식이 요청되는 상황에서는 교회가 갖는 가능성과 다양성을 체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칼빈에 의한 교회의 규율은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의존된다. 여기에서 보여 지는 두 가지 규율은 우선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우신 대리자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다음으로는 직분에 합당한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서로 간에 기능적 봉사를 통해 교회를 세우며 연합시키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제네바를 개혁시키려했으며 개혁에 대한 저항과 반발을 교회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제도를 만들어 그들을 통해 치리하며 온전히 이루어 나갔다.
물론 이일은 칼빈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 강권적인 힘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게 하고 해석하게 하고 자신의 모든 사역을 결정하게 했다.
칼빈의 제도적 경건에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 역시 선교 초기부터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전도에 힘을 썼을 뿐 아니라 엄격한 권징을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1891년 주한 선교부는 이것을 규칙과 내규로 제정 시행하였다.
지난 8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부흥이 정체되고 목회자가 경쟁적으로 수많은 교파에서 양산되면서 목회자의 자질과 윤리가 의심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일부 자격이 없는 목회자로 인해 교회는 교회대로 영적으로 피폐해져 교회의 영적인 각성이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 칼빈의 엄격한 제도적 경건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최근 한국의 기독교는 전 국민대비 20.3%의 교인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통계를 보면서 서울과 호남지방을 제외한 복음전도가 취약한 여타 지역에 개척의 불길을 지부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한 칼빈의 제도적 경건이 재정착되어 실추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세우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 뿐 아니라 교회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믿음의 기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