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 칼빈의 기독론과 영국학파(English Academic School)의 기독론 비판

조봉근 (광신대학교)



1.서론
죤 칼빈의 기독론은 그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 제 Ⅱ권 전편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여기서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율법 안에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미친 구속의 역사를 먼저 제시하고, 이어서 은혜언약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땅 끝까지 미친 구속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 강요 제 Ⅱ권은 전부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인 제 1장부터 제 3장까지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함을 지적하고 있어서 실제로는 인죄론에 속하는 부분이고, 본질적으로 기독론이 시작되는 부분은 제 4장부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가를 성경적이며 신앙적 논리로 추적해 가고 있는데, 어거스틴의 “은혜와 자유의지론”을 인용하면서,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인을 다루시는가”라는 성경적 예증들을 제시하면서 그 사역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신학자들이1) 전개하고 있는 기독론적 주제들(Topics)과 같이 그리스도의 양성론2) 과 삼직3) 과 그리스도의 사역 등을 설명하는 부분은 최종적으로 제 12장부터 제 17장까지에 집중되어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명하게 주장되고 있다. 또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조금도 성경적 이해를 벗어남이 없이 올바른 주장을 하였다. 즉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4) ” 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성경대로 이해하고 믿었다. 예를 들어서 그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에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이시다5) ” 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칼빈의 구원론도 단순히 율법 자체에서부터 설명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란 말씀으로 시작된 것은 “하나님 안에서”란 말씀의 의미도 되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란 말씀도 되기 때문에, 중보자의 개념에 앞서서 이미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신적인 차원을 새길 수가 있는 것이다. 칼빈이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 남이니라6) ”고 인용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분명히 하늘의 기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속한다7) ” 즉 “독생자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지닐 수 없다8) ”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9) ”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어서 “심지어 옛 언약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10) ”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칼빈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으로 믿었다. 어떤 이단자들처럼 반신반인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고 완전한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다윗과 그의 후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다11) ”고 주장한다.

왜 중보자는 하나님과 동시에 인간이어야 하는가?

죤 칼빈은 세 가지 측면에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양성론(兩性論: 神性과 人性)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첫째,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간격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고12) ”, 둘째, “중보자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되어야 하며13) ” 셋째, “오직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할 수 있다14) ”고 전제하면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게 된 유일무이한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것이었다15) ”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덧붙여서 대답하기를, “만일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었겠는가?16)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비밀스러운 경륜(작정과 섭리)을 만세 전부터 준비하고 시작하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성육신 사건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속죄 사역에 있어서 그의 질문은 무엇이었나?

칼빈에게 있어서 세 가지 질문이 다음과 같이 그의 주석들에 나타나는데,

첫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있었는가? 둘째, 속죄로써 실재로 일어난 것이 무엇인가?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정녕 지옥으로 내려가셨는가17) ? 등의 질문을 하게 된다. 칼빈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영적 고통에 대한 표현으로서 ‘음부에 내려가심’으로 해석한다.

속죄의 원인(기원)을 다룸에 일어서, 요 3:1618) 에 대해서 주석하고 있고, 속죄의 필요의 다름에 있어서 벧후 2:419) 에 대해서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속죄의 본질을 다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20) 과 수동적 순종21) 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1)그리스도의 인격
우리는 루터와 쯔빙글리를 토론함에 있어서, 그들의 신학이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뉘앙스(미묘한 감정과 의미)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중요한 강조점(그리스도 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에 못지 않게 개신교 신학의 위대한 해석자의 중심반열에 서서, 결코 기독론적 기초의 통찰력을 잃지 않았다. 칼빈의 골로새서 주해에서, 칼빈은 그의 완전한 기독론을 그의 신학적 프로그램의 초점으로 잘 채택하여 정립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신학의 진정한 과업은 “그리스도가 모든 그의 복과 함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의 기독론을 지배하고 있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실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적 역할 속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심지어 아주 사색적 기독론을 위한 증거로써 택해질 수 있는 본문에서까지(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느니라22) ”) 칼빈은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가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체23) 에 대한 것보다 오히려 능력에 대한 물음이다”라고 주석했다. 칼빈이 고전적 카톨릭 기독론의 한계 안에 머물려고 조심했다 할지라도, 그는 서슴없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체24) 나 특성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benefits)를 아는 것이다”라는 멜랑크톤의 진술에 대하여 동의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 존재의 감정 속으로 완전히 들어감이 없이 단지 한 인간이 되는 것처럼 가장한 하나의 환영25) 같은 모양이었나? 칼빈은 지속적으로 이것을 부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제하의 설교에서 칼빈은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최악의 환경을 묘사했는데, “그는 말하자면 모든 가족과 친지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그를 영접할 마구간과 그 집 지배인만 있었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어떤 명예나 명성도 없이 극도로 가난하였으니, 말하자면, 노예로 자신을 복종시켰다26) .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의 수렁처럼 보이는 곤경속으로 내던져졌다27) . 속이 들여다 보이는 흉내[행동]를 연출함(행동화 함)이 전혀 아니며, 그리스도는 실제로 슬픔을 통하여 압박당하셨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에게 도움을 주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28)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형제가 되기 위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비굴하거나 비열해지지 않으셨으니 그에게는 조금도 비뚤어진 구렁이 없었다. 칼빈은 성육신의 동기에 관한 흥미로운 트위스트 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비로 익숙해진 인성으로 옷 입혀질 필요가 없었으나 그는 사람들을 그렇게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즉 인간의 불행으로 말미암아 만일 시험(검증)받지 않는 한 그는 친절하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악들이 우리를 억압할 때, 이것이 우리의 직접적인 위로(위안)가 되게 했고, 하나님의 아들자신이 경험하시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일어나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고, 마치 그가 우리와 같이 고뇌를 당하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 고뇌 속에 있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29) . 그러나 칼빈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강조는 고전적인 기독론적 교의의 다른 극단에 관한 그의 주장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역시 참 사람이었다. 물론, 성육신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의 육신의 베일아래 그것을 감추었다. 이것이 일종의 도케틱 기독론을 의미하는가? 결코 아니다. 칼빈은 이러한 생각을 지속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즉 그렇게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신의 “오직 계시 의존적 신학30) ”의 원리를 위반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칼빈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소홀하게 다루었다면 이 주장은 보다 강한 힘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이 확고함으로써 칼빈주의 자들이 아닌 사람도 칼빈을 위하여, 창조와 구속의 원천이셨으며,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계셨던 성육신 안에서 구속하시는 말씀과 영원한 말씀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노선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데비드 월리스(David Willis)31) 가 보여준 것처럼, 이렇게 해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하나님 자신의 완전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는데 기능을 다하고 있다32) .” 칼빈의 실제 관심은 성육신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천분지일 정도로 높여진 인성을 함께 다루고 있지 않을 것이지만 육신 안에서 실현(표현)된 하나님을 함께 다룰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형식은 칼빈을 그리스도가 지상사역(도케티즘과 상관없이)을 하는 동안과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일종의 “노동의 분할”을 할당하도록 인도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재능에 대하여 가지시는 하나님의 화해33) ’를 의미하는 최장의 표본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념을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즉 칼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다른 말보다도 중보자(Mediator)란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심지어 우리의 죄로부터 구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중보자’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유한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이 모든 쇠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할지라도 그의 상태(조건)는 그가 너무 미천하기 때문에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34) ”라고 주장한다.

(2)그리스도의 사역
칼빈은 안셈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지만 칼빈의 속죄론의 형식이 단지 그의 초기 이론의 반향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칼빈의 독특한 신학적 관심의 표본이 되는 다섯 가지 교리적 국면들을 간추려 살펴보면,

첫째로, 안셈은 거의 성육신의 본체론적 필요성(필연성)을 전제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된 인간성을 구하기를 원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이 되심으로서만 그것을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성육신을 위하여 그저 단순한 필연성이나 절대적인 필연성을 부인했다. “만일 누가 왜 이것이 필연적인가고 물을 때, 그것은 단순한 필연이나 절대적인 필연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은 하나님의 작정, 즉 인간들의 구원이 의존하고 있는 신적 작정으로부터 거슬러 올라 간 것이다35) ”라고 칼빈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한 설교에서,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의 심원한 수렁에서 우리를 능히 구원할 수 있었으나 그가 그의 독생자를 죽이셨을 때, 그의 무한한 선의 보고들을 기꺼이 들어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속죄는 우리의 연약함과 그의 죄성 상태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화해에 대한 최상의 예증이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의지가 외면(외부)을 또 다시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실상, 순수성으로부터 결코 타락하지 않았던 선택된 천사까지도 그들의 머리와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말하자면, 인류의 타락이 중보자를 필요로 한다. 칼빈은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면서 참 사람이셨다는 것을 얼버무림(equivocation) 없이 확언했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인 선지자직과 왕직과 제사장직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했다. 구약성경에서 각각의 직무는 메시야 지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하나의 성취를 예표된 거룩한 기름을 부음으로써 임직식을 가졌다. 그의 선지자적(예언자적) 직무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자요 증인으로서 성령부음을 받았다. 그는 이 직무를 그의 가르치는 지상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복음 선포사역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그렇지만, 칼빈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단지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했던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하나님과 그 통치를 또한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직무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부관으로 봉사한다. 심지어 그의 비하되심과 죽으심 중에서도 참회한(회개한) 강도가 “교수대 위에서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두렵고 떨리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의 통치를 축하하며, 죽는 순간에 그를 생의 창조자로 선포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을 권고했다. 즉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십자가 아래서” 그들의 전 생애를 바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승리자로 나타나시게 된다는 사실을 권고했다36) . 그리스도는 그의 순수하고 깨끗한 중보자로서의 재능으로 제사장직을 성취했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렸으며, 인류의 죄 때문에 발생한 노여움을 완전히 만족시켜 드렸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적개심(원수요인)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자신이 신자들과 완전히 화목을 이루신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완성된 속죄37) 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악을 도말하신다38) ”. 이것은 안셈의 “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나?”라는 유명한 논문에 의해서 정립된 죄책론과 보상적 속죄론 같은 데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로, 안셈은 어떻게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義)가 바르게 고쳐졌는가를 먼저 보여 주려는데 관심이 있는 반면에, 칼빈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예증된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칼빈은 바울의 증거를 따르면서 하나님과 화목되기 전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들로 판결을 받았음을 주장했다39) . 동시에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 그의 신학적 논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40) . 칼빈은 어거스틴의 주장을 인용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를 모두 나란히(병렬 안에서) 판결을 받았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41)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대적하고 불의를 행하고 있을 때에도 사랑하셨다. 그리하여 그가 우리를 미워했을 때에도 이같이 놀랍고도 신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미워한 것은 우리가 그를 만드신 본래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아직 그가 지으신 선하신 것을 아주 소멸해 버리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만드신 우리 각자를 미워하며, 동시에 그가 만든 것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다42) .

셋째로, 안셈의 이론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쨌든지,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하고 무죄한 삶을 드릴 능력이 있던 인간으로서 무구제(구제할 필요가 없는 수준)의 평가에 속해 있었다. 안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그의 죽음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진가와 혜택(유익)을 발생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비하43) 된 모습 속에서 죄인된 모양을 볼 수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세례요한의 소리를 듣게 된다.

넷째로, 칼빈의 속죄에 관한 토론에 있어서, 죄책에 대한 만족과 보상에 관한 법률적 용어가 지배적이라 할지라도, 그는 마귀를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로서의 속죄의 동기인 ‘승리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주제를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그의 재림에 대한 약속들은 모두 악의 무리를 정복한 그의 승리에 대한 증거들이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이 승리들은 그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거울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지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 승리자의 상을 지키지(가지지) 않지만 그의 몸의 구성원들(지체들)과 그 상을 나누신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간절한 탄원 속에 명확히 표현되었는데, 즉 신자들이 악한 자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간청하는 대목에서 여실히 표현되고 있다.

다섯째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객관적인” 특성을 강조한 신학자들의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주관적인 국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즉, 우리의 행위에 관한 그리스도의 사역적 국면이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우리의 순응(순종)적 국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우리가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본래의 순종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한 효험(efficacy)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포함되어 있다. 즉, 그의 죽음을 무용하고 열매 없는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야 할 효험이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에 포함되어 있다44) . 신자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유45) 가 칼빈이 제목을 정한 ‘기독교 강요’ 제 Ⅲ권의 주제이다.

다음으로, 영국학파(English Academic School)에 속하는 신학자들의 기독론을 분석하고 비판하려고 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기독론을 분석하고 비판하려고 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신학자들 중에 제퍼리 람프와 모리스 와일즈와 씨 에프 디 모올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신론(Theology) 안에서 기독론을 다루거나 혹은 성령론(Pneumatology) 안에서 기독론을 다루고 있어서 유니테리안주의나 비니테리안주의의 입장에 서있다.

2.제퍼리 람프(Geoffrey Lampe)의 기독론과 그에 대한 비판
제퍼리 람프는 유니테리안이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적인 신학적 사고는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유일신 하나님안에서의 사역을 주장하고 있고, 창조의 계속적인 사역 안에서 성경전체를 해석하고 있다. 람프는 정통적인 신학적 구조(하나님의 창조사역 - 인간의 전적타락 -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 성령의 적용사역)를 완전히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적용사역등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따라서 람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육체의 부활등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필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람프의 기독론은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람프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피조물로서의 본유적인 불완전성을 주장하면서 지금도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람프는 정통적인 교리체계에서 분명히 벗어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퍼리 람프에 의하면,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긍정적 명제와 ‘예수는 오늘도 살아 계신다’라는 긍정적 명제는 둘 다 기독론의 분석적 사고를 주지 않는다46) .

첫째, ‘예수는 주님이시다’ (고전 12:3, 빌 2:11)라는 명제는 고대시대의 왕권과 왕직의 상징주의를 회상케 한다. 최초의 기독교 전통은 예수를 다윗 왕조의 왕과 동일시 해 왔다47) . 제퍼리 람프에 의하면, 둘째, ‘예수는 오늘도 살아 계신다’라는 명제는 두 가지 국면의 특별한 참고와 함께 기독론적인 동일한 질문을 야기시킨다48) .

그는 1)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동시에 2) ‘예수가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확실히 그리스도에 대하여 ‘현대의 살아계신 임재’로 말한다49) . 그러나 현재적 실재로서의 ‘그리스도’는 예수의 역사적 모습보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의 저자들이 우리에게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신비적이며 모호한(양면적인) 특징에 대하여 지적한다50) 는 것이다. 여기서, 제퍼리 람프에 의하면, ‘이 그리스도가 예수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그 자신과 화해시켰던 그의 ‘살과 피’로 구성된 육신(육체) 안에서, 그의 죽음으로써 의 그리스도는 예수와 동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는 또한 예수가 아니다’ 혹은 ‘좌우간에 단지 예수는 아니다’,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혹은 ‘지혜문’ (구약 성문서)이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하나님의 영’이다51) . 제퍼리 람프에 의하면, 하늘들의 하늘 위에 멀리 승천하신 그 그리스도는 그 자신 속에 모든 인간을 포함하고 개괄한 하나의 대표적인 그리스도이시다52) .

둘째로, 제퍼리 람프에 의하면, 우리가 본 것처럼 바울과 요한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식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임재를 동일시하려고 접근한다. 바울이 말하는 대부분의 언급(의미)은 ‘그 영과 그리스도’가 하나의 실재나 동일한 실재에 대해서 말하는 상호교체적 방법이다. 혹은 아주 최소한 ‘그 영’은 그리스도가 믿는 사람들에게 임재한 형태(양상)이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증표(Sign)가 그가 우리에게 주신 ‘그 영’(the spirit)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령의 결과(효과)와 하나님의 거하심은 동일하다. 즉, 사랑은 동일하며 그런 까닭에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것처럼 동일하다. 앞에서, 요한은 바울처럼 내주하시는 영과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요한은 신약의 다른 저자들처럼, 성령의 완전한 내주하심과 그리스도의 임재를 동일시하는데 방해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재한 아들 역시 후재한 예수로 믿기 때문이다. 하늘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인격적 임재가 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다시 오실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선재한 로고스-아들’의 개념에 관한 기독론을 기초로 하는 것을 지속하는 것보다(계속해서 근거를 두는 것보다) 임재한 영과 임재한 그리스도의 구별을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53) .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무덤을 떠났다(없었다)는 전통적 신앙과 몇 명의 제자들에게 보여진 것과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 한(Conversed with) 것, 제자들의 몇 명이 신자들의 경험과 어떤 의미심장한 차이를 만드는 것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 ‘우리 안에 계신 영’, ‘그 영 안에’ 존재의 상태, 삶으로 묘사했다. 코프만(G. D. Kaufman)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실제로 임재하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주권적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54) . 그것은 예수의 수난절 역사를 깨치시고, 부활출현과 교회 안에서의 성령 활동으로 확정되었다. 이 진술은 한 가지 이상의 관점에서 질문을 야기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역사를 깨뜨리는(파괴하는)’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첫 번(처음) 일지라도, 부활출현의 본질과 그들을 위한 증거의 강점(장점)을 평가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55) . 다른 면에서, 코프만은 그의 지각이 옳은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자기계시의 초점과 신자들의 성령경험, 즉 그들은 감동(영감)하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역사적 예수 사이의 지속성(연속성)은 통치하시는 주권적 사랑이신 그의 창조와 구원사역 안에서의 하나님 자신의 연속성(지속성)이다. 확실히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설교는 헛것이요. 너희의 신앙도 헛것’이라고 주장했고,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라고 알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켰기에 하나님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를 부활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만일 죽은 자가 부활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 역시 부활되지 않았고, 그리스도가 부활되지 않았다면, 너희 믿음은 쓸데없다(무익하다). 즉 너희는 아직도 너희 죄 가운데 있느니라.”56) 여기서 바울은 반대자들과 논쟁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의 구원에 대한 실재 신앙과 죽음 이후의 삶이 무엇이든지 있을 수 있다는 반대론자들과 논쟁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그의 주장은 아주 모호함을 남긴다. 바울이 말하는 이 괄호의 부정은 ‘그리스도가 부활되셨다’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가리킬 것이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위한 적절한 역사적 증거였던 어떤 부정에 대항하여 논쟁하지 않고 있으며, 그 자신을 포함하여 예수가 많은 백성에게 나타났던 역사적 증거를 예증으로 든다. 그는 확실히 복음의 실체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켰던 증거의 사실(진리)에 의존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에 의한 그의 변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변호하시지 않았다면, 그의 정죄(condemnation)는 아직도 유효했다. 그가 정죄 받은 법적 제도는 아직도 건재하며, 그리고 구원은 법적 사역에 의해서 존재하며, 믿음을 통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의 대상이 거짓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며, 죄인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의롭지 못하였다고 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바울의 사상은 모호성이 없지 않다. ‘그가 얼마다 더 육체적 세계의 실재 사건과 하나님의 예수 변호를 동질화하는가? 바울이 부활출현에 의하여 무엇을 이해했는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갈라디안에게 쓴 서신에서,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그의 복음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이르기를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 그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그의 아들을 계시하는 것을 기뻐했다고 하였다’ 그의 회심에 대한 이 불가사의한 암시들은 이러한 경험에 대한 바울의 과묵(입을 조심함)의 모형들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대하여, 그가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가를 추론할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말씀되어진 구약 선지자의 경험과 비교되었거나 비교 안 되었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대하여 그가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가를 추론할 수 없다. 계시가 그리스도의 환상을 통하여 그에게 주어졌는지, 외부적으로 전달된 의미를 통하여, 완전한 내적 경험을 통해서, 즉 계시통찰을 통하여 그에게 주어 졌는지 지시가 없다. 단순히 ‘나에게’ (to me)를 의미할 수 있는 ‘on emoi’란 표현은 오직 ‘내 안에’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이 가능하고, 바울이 내적 경험으로서 계시를 간주했던 것을 지시함이 가능하다. 또 한편, 사도가 되는 그의 주장을 함에 있어서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수사학적 질문을 하는데,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보지 않았는가?” 이렇게 환상적 경험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바울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불가능하다. 고린도후서에서 빛의 찬상기억은 그의 말들의 기초가 되는 것이 꼭 가능하다. 왜냐하면 ‘흑암 중에서 빛이 비취게 하라’고 말씀하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비췰 그의 빛을 생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계시의 빛을 주시려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속에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다. 바울은 신자가 새 피조물이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으로 변화시키는 영향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새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꿔지는 가운데, 새 언약과 모세 언약에 대해서 바울이 비교하는 말과 구절을 반향시키고 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새 언약에 참석하는 더 큰 영광과 대조되는 영광의 한 비교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그 자신의 회심을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주 개연성이 없다. 고전 15장 8절에서, 죽은 자가 부활된 것을 부인하고 있는 자들을 반박하는 주장을 소개하고 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또 ‘나에게 보여졌다’고 말한다57) . 이것은 비슷한 말로 묘사된 구약의 신현의 하나처럼 나타난 모양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육체적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을 믿었는지 혹은 내적 환상인 그의 경험을 간주했는지 추론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바울의 회심에 대한 누가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아주 짧은 어떤 암시적 언급도 없다58) . 이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말한 목소리와 눈멀게 한 빛에 대해서 말한다. 세 개의 대화가 완전한 일관성이 없을지라도, 그 경험은 분명히 바울에게 사사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런 말로써 묘사되었다. 그들이 그것을 바울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언급된 존재의식이었음을 분명히 해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부분의 다른 회심 경험과 구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부차적 기독교 역사 속에서, 눈멀게 한 빛과 ‘들음’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다른 회심 경험과 분별되지 않는다. 사실상 얼마나 더 이 출현이 다른 신자들의 경험들과 실제로 달랐던가를 결정하기는 실로 아주 어렵다. 즉, 얼마나 더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의 인격적 임재를 포함(함축)했는지, 혹은 얼마나 더 그것이 신적 계시로 해석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영을 벗어나 인간의 영으로 도달하는 신적 계시로서 해석될 수 있는지, 즉 바울은 예수의 말로 이해했다. 버나데트(Bernadette)에게 임한 계시는 마리아의 말로 이해되었던 방법 안에 다소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말로서 사도 바울은 이해했다. 바울 자신이 의심없이 믿었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 게바, 열두 제자, 오백 형제들, 제임스와 모든 제자들(사도들)이 그의 경험과 흡사한 경험을 나누었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나타났다. 그는 역시 마지막 계열에 속한 그 자신에게도 나타나심을 아주 분명히 간주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 즉 그 자신의 독자들 같은 다른 사람이 흡사한 계시를 받을 것으로 분명히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특이함을 구성하고 있는가를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울이 아주 강력하게 강조하는 것들 중 하나의 특징은 그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그에게 사명위임을 관련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를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할 사도로 만든 이유였고, 바울이 게바와 나머지 종들에게 나타나심이 역시 선교를 위한 소명의 사례였음을 믿었던 이유일 것이다. 바울의 회심에 대한 바울 자신의 알기 어려운 암시적 언급으로부터 판단하는 것은 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누가의 두 차례 거듭된 언급으로부터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이 ‘부활출현’ 뿐만 아니라 원초적으로도 바울이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되셨다는 믿음의 진리를 보증한 사건으로 보여질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것을 행하였다. 그것이 그것에 대하여 언급한 이유이다. 죽은 자가 부활된 것을 부인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대답함에서, 게바와 다른 사람에게 함께 나타나심을 언급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이 회심 경험의 가장 중요한 국면은 그가 그의 선교적 소명으로 영감된 것이었다. 복음서들에 기록된 나타나심은 이러한 소명과 위임의 요소를 역시 나타낸다59) . 그러나 이러한 대화들은 양식화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는 보다 더 구체적인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바울의 과묵한 암시적 언급보다 유물적인 말들이 형성되었다.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러한 말들의 얼마는 전도여행에 대한 누가의 생각과 같이 엠마오에서의 만찬은 부활절이야기 형태 속에서 던져진 후기 기독교인의 경험과 묵상과 분명한 반영이었다. 이러한 경우에, 예수에 대한 예언서로 구약에 대한 그들의 열람 속에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계속적인 만남과 교회 성만찬에 그들의 동참으로 예수에 대한 예언서로서 구약 성경을 그들이 읽음으로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계속적인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나 빈 무덤의 이야기들도 우리에게 그 ‘나타나심’이 실제로 확신을 산출하였는지의 여부를 묻는 물음에 대답하려는 노력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없다. 우리에게 이러한 나타나심들이 주관적인 환상이었는지, 혹은 개인적이었는지 즉, 말하자면, 예수의 육체적 임재는 실제로 인간의 육안으로 보여졌는지의 물음에 대답하게 하는데, 신약적 증거가 아직도 빈약하다. 전자의 질문은 최근에 자주 토론되어졌다. 그리고 다른 편의 주장들은 고르게 균형을 이루었다60) .

전체적으로, 그것은 예수의 환상들이 첫째로 확신을 주었다고 보여 진다. 죽음에 의해서 정복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먼저 일으켜 주었다고 보여진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개연성 이상을 확립할 수 없다 할지라도 예수의 환상이 그들이 이러한 환상들을 보았다고 믿고 주장했던 사람처럼 개연성 이상의 확립을 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죽음에 의해서 정복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먼저 일으켜 주었다고 보여진다.

또 한편, ‘하나님께서 예수를 변호할 것이라’는 우선적 믿음없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주 가능하다(그리고 그 자신이 어떤 종류의 신적 변호를 기대했으며, 이런 소망을 그의 제자들에게 같이 나누었다). 그래서 그의 부활의 관념은 그들에게 전적으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보는’ 경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초기의 전통에 따라서, 사실상 나타나심들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자들에게만 나타났다. 혹은, 바울의 경우에 이미 예수님과 난폭한 적의로 반동하는 그의 제자들의 신앙에 대해서 충분히 알았다. 이 모든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를 볼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가 하나님에 의해서 변호될 것을 믿었기 때문이며, 또 그가 계셨던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같이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었는지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일 그들이 예수의 부활 현현과 빈 무덤의 전통을 믿지 않았다면 오늘날같이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었는지 대답하기가 매우 난감하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바울이 두는 확신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존재의식을 언급했느냐? 즉 예수의 부활은 바울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보았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입증되었다고 바울이 주는 확신에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존재의식을 의식적으로 언급했느냐? 그런 확신 없이는 복음이 있을 수 없다는 바울 자신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그 대답은 아마도 ‘아니요’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대부분의 개종자들은 먼저 다메섹 도상의 사건 같은 어떤 경험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의심할 것 없이 그들이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보았다는 확신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 자신의 신앙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자신의 존재의식 이상으로 게바와 야고보와 바울과 기타 나머지 사도의 증거보다 더 낮게 기초되어서는 안된다. 크리스찬들은 모두 ‘예수가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셨다61) . 고 믿었지만, 누가의 전통 밖에서, 승천은 시공간의 유한한 관점에서 나타났던 사건으로서 정시되지 않았다. 현대적 임재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서 실제로 일어났던 것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 부활절에 설교자들은 자주 그들의 집회에서 말한다.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진실로 부활하셨다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실제 증거가 그의 살아 있는 임재에 대한 그들의 현대적 경험이라고 그들의 집회에서 자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오늘날도 살아 계신다.’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설교자는 ‘여기 부활절 성찬에서 예수 부활의 진리에 대하여 확인을 부가할 것이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부활 이야기의 진리가 현재 신자들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유효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만일 구체적 사건으로서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현재적 경험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함축성)로서 신자들의 현재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부활진리가 유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을 본 자들의 신앙을 발생시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환상들이 되어 올 수 있다. 그리고 반대가 아니요, 오직 이것이 첫 번째 제자들의 상황이 후세대의 신자들의 상황과 아주 달랐다 할지라도 후자는 보지 못한 자들이지만 믿음을 발견했다. 부활로 출현하심과 빈 무덤은 그들 자신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변호를 위한 증거를 직접 공급할 수 없다. 그들이 처음 제자들을 위하여 사려있게 행했던 것처럼, 최선으로 그것은 믿음이 사건으로서 부활자체에 기초를 두려고 노력하는지를 의존해야 하는 확실한 이야기의 신뢰도에 의존해야 한다. 사실상 바울의 언급 속에, ‘예수 안에 하나님의 아들들’ 그들의 본질적인 부활 사건으로 돌아가 언급해야 하는 의식이 있는 오늘날의 신자들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보여 지지 않는다. 그들이 ‘죄에 대하여 죽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는 그들의 신앙이 좌절할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 즉 원초적 부활 사건으로 돌아가서 언급해야 한다. 반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그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그 자신의 경험의 조명으로 그의 친구 신자들의 경험에 의하여 확증되었고, 또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종교적 전통에 의하여 결정된 얼마의 범위에, 부가된 보호신청 없이도 ‘예수는 오늘날도 살아 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부활 출현하심과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요점은 실제로 사실이다’는 것을 제공했다. 그리고 만일 현재적 신앙이 부활절 사건의 역사적 증거에 의하여 구성되지 않으며, 그 부활사건의 역사적 증거에 의존되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현대적 신앙은 그 증거를 확증할 수도 없으며, 그 사건을 실증할 수도 없다. 만일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그 질문의 대답은 역사적 요구에 대한 적절한 표준사용을 통하여 오직 성취될 수 있다. 믿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그의 죽음 후에 살아있게 보여졌는가?” 왜냐하면 아무런 ‘믿음’의 결과나 정통의 결과도 우리에게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가 오늘날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만나야 하고, 만날 수 있는가?’ 혹은, 내가 그 질문을 더 잘 표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오늘날도 예수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능동적 임재와 호늘날도 새롭게 하며,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성령 하나님의 능동적 임재를 만나야 하며, 만날 수 있는가?” 역사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의거해야 하는 증거의 평가가 아주 넓게 다르다. 얼마의 증거는 바울 서신과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최소한 그런 요소들에 대한 심사숙고한 적극적 가치를 덧붙일 것이다. 또 한편, 우리가 본 것처럼 부활로 나타나심에 대한 바울의 암시적 언급들은 짧고, 그것은 그들의 본질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을 연결해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복음서들 속에 있는 부활 이야기들은 기독교 신자들의 계속하는 경험에서 돌아가 읽혀진 많은 자료를 포함한다. 누가의 엠마우스(Emmaus)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제자를 만들라는 주의 명령에 대한 마태의 기록에서도 그리고 세 가지 이름(성부, 성자, 성령)으로 세례를 주라는 마태의 기록에서도, 그리고 또 다시, 요한의 부활에 관한 대화에서도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역시 유대인 반박자들과의 논쟁을 나중에 영향을 준 요소들을 포함한다(무덤의 군병에 대한 마태의 이야기에서처럼).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사실상 유령을 보았다고 주장한 몇 사람과 함께 유대인 도전자의 반박을, 후에 영향을 받은 요소들이 역시 포함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제퍼리 람프의 부활관은 정통교리가 주장하는 육체부활을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성주의적 사고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부활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