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로서 칼빈


Prof. Dr. W.H.Neuser

번역: 추태화 박사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이 논문은 칼빈의 성경해석에 관한 나의 첫 번째 글이다. 먼저 칼빈의 성경해석에 대하여 전체적인 조망을 보여줄 것이며, 다음으로는 성경 구절에 대한 실제 해석을 언급하려 한다.


1. 들어가기

몇 년 전 한철하 교수(전 아세아연합신대원 총장)로부터 칼빈을 선교사의 입장에서 볼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에게 정확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확실한 기억은 1557년 브라질 신앙고백이 탄생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이 살아있는 동안 브라질에 선교센터를 건립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단체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칼빈 초기 저작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 눈에 뜨였다. 그것은 1535년 출간된 올리베탄 성경(Olivetan-bible)에 들어있는 신약 성경 서문이었다. 엄격하게 검증한 바에 의하면 이 작품은 칼빈의 첫 번째 신학 저술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 1536년에 간행된 기독교강요보다 앞선 작품이었다. 올리베탄 성경은 불란서어로 세상의 빛을 본 두 번째 성경이었다. 그 성경은 알프스에 사는 발덴저 지역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불란서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서문은 1536년이 되기 직전에 쓰여졌다. 이 글은 1800년대까지 인쇄된 188 쇄의 불란서 및 영어 성경에 뒤지지 않는 가치를 가졌다. 이탤리와 스페인 성경 인쇄본도 앞으로 추적해야할 숙제를 남기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서문이 칼빈의 저술 중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칼빈 연구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본다.
1543년에 인쇄된 서문에는 두 가지 부제가 붙어있다. 1장: 어떻게 우리 구주 예수께서 율법의 완성이 되셨는가. 2장: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의 전부. 마지막은 3장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수신자에 대한 권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들에게 의문으로 남는 것은 무슨 이유로 칼빈이 2장과 3장을 구분했느냐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선교적 접근을 이해할 수 있다.


2. 수신자들

칼빈을 이방인들 속에 있는 선교사로 본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너무 앞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칼빈이 몸 담고 있던 세계, 그리고 당시 종교개혁가들의 세계는 서부 유럽이었다. 터어키 군인들이 당시 비엔나 근처까지 침공해 들어와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다. 아메리카는 발견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선교지로 여겨지지 않았다. 유럽을 제외한 이방지역으로 향하는 길은 아직 열려지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남아있는데, 칼빈은 올리베탄 성경의 구약성경 서문에서 이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칼빈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원했던 것이다. 칼빈의 동시대인들은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세례가 강제적으로(관습적으로) 시행되던 시대에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례교육은 종교개혁을 통하여 시행되었다. 칼빈은 두 그룹을 언급한다: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 신앙인들은 신앙 안에서 더욱 강건해야 하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신앙으로 인도되어야 했다. 이 점에서 칼빈은 선교사가 된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칼빈은 사회 속에 있는 모든 계층에 진솔하게 말을 걸고자 한다: 남자나 여자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가르치는 자나 학생이나, 영적 지도계층이나 평신도들이나, 불란서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라틴어에 정통한 사람이나 구별을 짓지 않았다.(49, 4-10행). 여기서 불란서-독일어 간행본을 인용해 본다.(E.Saxer, 칼빈 연구, 제 1권, 1, Neukirchen-Vluyn 1994, p.27-58, cf. W.H.Neuser, The first outline of Calvins theology - the preface to the New testament in the Lovetan Bile of 1535, Kores. Bulletin for Christian Schlorship 66, 2001. No.1 & 2, p.1-38). 여기서 칼빈을 전도사라고 명명해도 될 것이다. 그는 아주 깊은 연관성을 언급한다: 칼빈은 남자 기독교인들과 여자 기독교인들은 언급한다.(49, 38행). 그 다음에 세상의 쾌락에 연관된 사람들을 언급하는데 그들은 영생을 추구해야 할 사람들이다.(49, 48행 ff). 그 다음으로 인간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수공업자들과 지식인들을 언급한다. 그들은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51, 7-16행). 지식인들은 휴머니스트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당시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자들이지만, 결국 전심을 다하지 못했다. 칼빈 자신도 전에는 그들 그룹에 속해있기는 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라는 인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뮈우(Meaux)의 개혁가들을 향한 인사였다고 본다. 그들의 프로그램이란 다름 아닌 복음과 - 전도운동 -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집중이었다. 하지만 칼빈은 그들이 단지 성경적 도덕주의를 주장하고 있을 뿐 진정한 신앙적 경건은 소유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칼빈의 프로그램은 아주 근대적인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과 영생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중간 그룹, 그들은 신앙과 인간적 지혜를 혼합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정체불명의 이상(理想)으로 뒤섞는 자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왕들, 귀족들, 관리들에게 보내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이 언급은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유익한 교리(딤후 3:16)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55, 46행 ff). 다음으로는 카톨릭 사제단에게 (말하고 있다.)


3. 제1장: 복음으로 인도하기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칼빈은 오직 성경에서 사유를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가노치(A.Ganoczy)는 그의 책 『젊은 칼빈』(The young Calvin)에서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칼빈은 성경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Piladelphia 1987, p.96). 그는 수신자들을 중요한 관점으로 안내하기 위해 오직 성경만을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과정을 알 수 있는가? 그는 제 1장에서 창조로 시작하여 성경을 두루 관통하고 있으며, 마지막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약적 예언으로 끝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문장은 이렇다: 전지전능하시고 홀로 뛰어나신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칼빈이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구원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독자들은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하고 간략한 선교적인 복음 선포의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칼빈은 그렇게 활용하고 있지 않다. 정확하게 살펴보자!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창조와 인간의 교만으로 상실된 인간의 고유한 속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점에서 창세기 1-3장을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는 아담과 이브의 이름, 타락의 개념, 뱀과의 사건, 동산에서의 추방 등이 생략되어 있다. 창세기의 역사에 있어서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이 언급되어 있다. 창세기 4-11장에 관해서는 노아, 물심판, 무지개, 바벨탑의 개념이 생략되어 있다. 그 대신 창세기 6장이 강조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한탄하셨던 점(창 6:6)과 또한 후손들이 죄악이 관영하게 살았다는 점(창 6:1-5)을 언급한다. 칼빈은 타락의 무서운 결과를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연대기적으로 훌쩍 뛰어넘는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는 언급되지 않는다. 칼빈은 그 다음으로 애굽에서의 구원역사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율법을 말한다. 그에게 십계명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이지만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에게서나 이방인에게서나 우상 숭배에서 아직도 신인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렇게 구약에 대한 설명이 끝난다. 칼빈은 구약의 언약에 관해 언급하게 될 때, 다시 이런 관점에서 시작하는 양상을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는다. 칼빈은 성경 초기역사를 살필 때 이방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점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창조 - 하나님의 형상 - 그 형상의 상실과 하나님의 심판: 모든 사람은 심판의 저주 아래 있다. 인류 초기 역사에 있어서 칼빈은 모든 사람에게 연관된 점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의 기본 상황을 간과하려 하지 않는다. 시나이에서 언약과 율법을 받은 것은 역시 이 점과 연관된다.

칼빈의 성경해석에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칼빈은 구약의 구원론적 입장에 관해 주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의 형상, 언약과 율법 체결), 인간의 거부, 하나님의 진노. 간단히 말하자면 은혜와 죄는 칼빈의 선교적 설교 첫 번째 부분의 주제이다. 이 점이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두 번째 단계로 칼빈은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성경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관시키기는 난해하지만 칼빈은 다음 문장으로 시도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기 위하여 새 언약을 맺는 일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더욱 든든하고, 확실하고,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41, 1행 f.).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구원론적으로 여겨진다. 새 언약이 보유하고 있는 고유함이란 그것이 더욱 상승된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이 더욱 든든하고, 확실하고,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있게 된다. 언약의 상승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언약에 영향을 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속된다. 칼빈이 언약신학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언약이 그의 선교적인 복음 선포를 위한 길잡이를 제공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언약은 다른 많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의 주제어일 뿐이다. 구약의 메시야 선포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창 3:15), 아브라함의 후손(창 12:3), 이삭(창 26:24)과 야곱의 축복(창 49:10), 70주(단 9:24).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예언에 관해 13개가 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게다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더 발견된다. 메시야에 대한 길고 긴 대망 속에서 예언들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은 기록된 율법을 예언이 되게 하였다. 그 속에는 많은 제사예식, 정결예식, 제물 등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들은 미래에 나타날 위대한 선물의 예표이자 그림자였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내용과 진리를 나타냈다.(41, 17-23행). 구약에서의 제물과 십자가 제물에 관한 언급은 간과되지 않았다. 칼빈은 여기서 다른 생각을 끌어낸다. 그것은 율법이다. 3개 성경구절이 이를 반증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며 완성이다(롬 10:4).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며(갈 3:24), 율법 아래있는 자들의 구원이 된다(갈 4:4f). 이 글에서는 위 성경구절을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첫 번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칼빈은 선교적 선포를 위해 율법 아래있는 인간의 상황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 말은 바울 서신 중에서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 점은 모든 종교개혁가들에게 해당되는 경향이기도 하다. 중세 교회에 대항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이 등장해야 했다. 율법은 구약에 언급된 구원의 표지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바울 사도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 안의 구원과 성령 안에서의 삶을 증거했다. 칼빈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점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상황 가운데서 말을 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록되지 않은 율법만을 알 뿐이었다.


4. 자연적 신인식과 연결 가능성

칼빈 사상의 특징 중 하나라면 자연적 신인식을 반복해서 연관짓는다는 것이다. 그는 종종 로마서 1장(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 피조된 만물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함,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남), 로마서 2:4(인자하심,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하나님이심), 로마서 2:15(율법이 이방인들의 마음에 새겨짐), 사도행전 14장(살아계신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각양 좋은 선한 일을 행하심), 사도행전 17장(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지 떠나 계시지 않음)을 인용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의 이방인 선교를 활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전제가 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도 세계의 주관자이며 심판자이신 신, 선함과 온유, 인내의 신을 알고 있다고 본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에 관하여 자연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근거와 변론을 든 후에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칼빈은 이러한 자연신학의 요소 속에서 연결고리를 찾고 있는가? 이 표현은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사이에서 벌어졌던 그리스도 복음의 연결고리를 둘러싼 논쟁을 연상시킨다. 나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연결고리를 부정했던 바르트가 옳은 것 같다. 칼빈은 모든 인간에게 부분적으로 주어진 신인식을 알았다. 모든 인간이 신에 관해 알고 있는 내용은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단지 신인식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칼빈은 기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분적인 신인식이란 말은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한 양적인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신인식은 창조주로부터 인간에게 심겨진 은혜이다. 이것은 선물이지 결코 소유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은 이 선물을 상실해서는 안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한 사람이 신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반대로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된다. 칼빈은 인간에 관한 고전적인 위상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묻는다: 사람이 창조된 그 위상에서 무엇이 사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대답은 이렇다: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언제나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것 등등(35, 10-12행).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빛에 관하여 눈이 멀었다는 점(롬 1:21 b), 경고에 관해서 귀가 멀었다는 점, 계명에 관해 마음이 강퍅해져 있다는 점이다(39, 26행 f). 우리는 여기에서 칼빈의 신학사상의 주요한 논점에 서있다. 그는 존재론적이 아니라, 행위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그를 잃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세울려고 하는 자연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선교사 역시 그 일을 할 수 없다. 설교자는 이 본래적인 인식을 건드릴 수는 있지만, 하나님만이 사람에게서 새롭게 역사하시므로 인간이 신앙에 이르게 한다. 바로 이와 같은 행위론적 사유를 전체 기독교강요에서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거론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칼빈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시편으로부터 많은 구절을 모았는데, 이는 모두 생명이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말없는 힌트이기도 하다. 칼빈은 그것들을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인식이나 깃발의 표식(37, 22-24행)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 권능, 은혜, 지혜, 영원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새들은 하나님을 노래하고, 짐승들은 그를 부르며, 만물은 그 앞에서 떨며, 산들은 그의 권능을 선포하고, 강들과 샘들은 부드러운 눈길을 그에게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37, 38,40행). 오늘날의 복음선포에서도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들어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수많은 요구들을 기대하도록 그렇게 자연친화적으로 교육받았는가?


5. 제 2장: 그리스도 안의 구원 선포

복음으로 안내하는 일과 복음의 주제는 칼빈에게서 동일하지 않다. 율법의 손에 표현된 구원사는 전부, 즉 기독교 신앙의 중심 내용이 아니다. 신앙의 전체는 칼빈이 언약의 개념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과 메시야 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언약은 새롭고, 변하지 않는 언약이며 동시에 유언자의 언약이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히 9:15)이며 언약을 보증하셨고 자신의 죽음으로 확증하셨다(히 9:16).(45, 5-8행).
복음이란 말은 언약과 동일하다. 그리스도에 관한 승귀의 직책에서 이는 설명된다. 칼빈이 메시야 직책과 연관하여 말할 때는 언제나 증인이란 단어를 연상한다. 신약적인 언급은 선포적 성격을 띈다. 이는 다시 칼빈의 행위론적 사유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다. 확실하고 의심할 바 없는 증거는 인간에게 증거되어야 한다. 이 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칼빈은 끝까지 선교적으로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증인은 예수께서 세례받을 때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이다(마 3:17).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 강권적인 증인이 되신다(요1 5:6). 그 다음으로 가브리엘 천사(눅 1:31ff), 베들레헴의 천사(눅 2:13 f), 시므온(눅 2:25ff), 세례 요한(요 1:29), 베드로와 모든 사도들. 예수를 적대시한 자들도 그의 증인이 되었다: 가야바(요 11:49), 헤롯왕과 그의 처(마 27:19), 사탄과 더러운 귀신까지도 증인 그룹에 합세했다(막 1:25). 언급된 사람들의 증거들은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예수를 증거하는 예로는 그의 기적을 행하는 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우리에게 어쩌면 생소할지도 모르는 창조물들도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다: 바다의 폭풍(막 8:26),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드라크마를 물고 온 물고기(마 17:24), 바위가 갈라지고, 태양이 어두워지고, 수많은 죽은 자들이 일어났던 기록이 그것이다.(마 27:51 ff).
위에서 언급된 복음의 수신자들이 이와 연관지어 언급될 수 있다. 그 수신자들이 단순히 숫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증인들의 순서는 그 부름과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칼빈은 여기서 각성과 경고를 마다않는 선지자 같다. 그는 복음을 포기하기 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기를 원했다. 많은 면을 할애하면서 칼빈은 복음의 고귀함을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찬송은 신앙 안에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를 높이고 있다. 그리스도를 우리 곁에(51, 35행),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가는 것이다.(갈 2:20)(55, 30행).
칼빈은 이렇게 끝맺는다: 모든 빛의 주인이신 분은 거룩하고 구원을 부시는 복음과 함께 그의 성령으로 통하여 복음을 알지 못한 자들을 가르치시고,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시고, 못보는 자들에게 빛을 비춰주시고, 모든 백성과 나라에 진리가 다스리게 하신다. 그리하여 모든 세계가 한 분이신 하나님, 한 분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한 신앙과 한 복음을 알게 하신다.(57, 23-28행).
칼빈은 제2장(과 3장)을 사람들이 성경에서 알아야만 하는 바로 그 내용의 전부(Summe)라고 명명한다. 끝으로 그는 제 1장에서 구약적인 해석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클라이막스이자 주제라면 그리스도 복음이며, 목회적인 활용인 것이다. 칼빈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를 해석하기를 결코 힘들어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복음 선포는 여기서 그 클라이막스를 갖고 있는지 묻고 싶다.


6. 전망

이미 언급한 바있지만 이 신약 서문은 칼빈의 생애동안, 그 후에도 계속 판을 거듭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신학노선을 변경했는가? 그는 자연적 신인식을 주장하다 철회하였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뒤에 인간의 상실을 창세기 6장이 아니라 창세기 3장과 연관시켰다. 몇 가지 사례들은 더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향한 칼빈의 입장은 언제나 같았고 그의 전체적인 조망도 역시 같았다는 점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