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사랑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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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섭의 교회사 연구소에서 퍼왔습니다. http://www.church-history.org


( 다음은 칼빈의 아내인 이들레뜨 드 뷔르(Idelette de Bure)가 1549년 3월 세상을 떠난 직후에, 칼빈이 자신의 친구인 삐레에게 보낸 한 편지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편지는 1549년 4월 7일자로 보내졌습니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칼빈의 슬픔과 사랑과 신앙을 잘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참고로 칼빈의 결혼 상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본 후에 이 편지를 읽는다면, 칼빈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538년부터, 스트라스부르그의 한 난민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부터, 칼빈에게는 결혼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 방문해서 머무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칼빈의 연장자 친구였던 마틴 부쳐는 아마도 이런 상황을 보고 칼빈의 결혼을 독려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부쳐 자신이 루터와 더불어 종교개혁 1세대중에서 결혼했던 사람이었기에, 목회자에 있어서 결혼이 주는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칼빈 자신은, 이성 교제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결혼 전의 결혼관은 지극히 실용적이었지 낭만적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혼전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아내를 취해본 적도 없으며, 또 결혼하게 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게다가 설령 결혼한다고 해도, 결혼은 자신을 이런 저런 자그마한 걱정거리에서 자유롭게 해서 주님을 위한 봉사에 전심을 다할 수 있게 할 뿐이라고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배우자상은, 겸손하고 순응적이며 교만하지 않고 검소하고 인내심을 갖춘 여성이면 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은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그런 연애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칼빈이었지만, 자신의 회중에서 이들레뜨 드 뷔르라는 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1540년 8월 10일경의 일입니다. 그녀는 현재의 벨기에의 도시인, 리에쥬(Liege)출신의 한 재세례파 교인의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결혼 전에 작고한 전 남편사이에 태어난 두 자녀를 데리고 칼빈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아들(T.H.L. Parker는 그 이름이 Jacques라고 하지만, R. Stauffer는 반대하면서 무명이라고 합니다.)과 쥬딧(Judith)이라는 딸입니다. 칼빈은 이제 이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돌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자신이 어릴때 어머니를 잃은 이래로, 줄곧 망명과 신학과 목회의 현장에서 쫓겨다니듯 살았기 때문에, 여성의 따뜻함을 경험할 수 없었다면, 결혼 이후에는 비교적 안정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칼빈에게 있어서 이 아내는 단순한 "집사람" 정도가 아니라, 남편의 목회 사역을 실제로 돕고 섬기는 "참된 동역자"였다는 것이 지금의 편지를 비롯한 여러 군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제네바에서, 자신이 임신중이었음에도 성도의 임종시 찾아가서 위로하며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몇주후에 자신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드 뷔르 부인은 칼빈과의 사이에서 아마도 하나에서 셋의 자녀를 낳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Jules Bonnet, August Lang, William Bouwsma 등은 세 자녀가 있었다고 하며, R. Stauffer와 E. Doumergue 등은 오직 한 아들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시 유아 사망이 많았듯이, 그들의 자녀들도 모두 그렇게 비운의 경우가 되어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아들 쟈크(Jacques)는 1542년 7월에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맙니다. 이때의 칼빈의 슬픈 마음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으로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아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산후 조리에서 몸이 회복된 후, 심한 병에 걸려 병상에 있었던 때인 1545년에는, 아내가 데리고 결혼해 온 아들이 뚜렷한 이유를 알수 없게 가출을 하게 됩니다. 칼빈은 이 이복 아들을 찾아서 분주히 다녔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병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득 칼빈은 아내가 영영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을 심하게 갖게 됩니다. 그는 삐레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의 희망에 반대되는 일이 생길까봐 두렵다면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1549년 3월 29일, 이들레뜨 드 뷔르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남편으로서 칼빈은 임종시까지 아내의 곁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내에게 전 남편의 아이들을 책임있게 돌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는 아내의 임종시 고통을 억누를 수 없어서, 자리를 잠시 떠나 그녀가 평안히 눈을 감는 것을 보기 전까지 기도했습니다.

칼빈이 아내의 사후에도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는, 3개월후 믿음의 형이요 동지인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쳐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자신은 반쪽 밖에 살고 있지 않다고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자신의 아내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1550년에 출판한 자신의 데살로니가 주석을 자기의 아내를 정성껏 돌보아준 의사인 브노아 덱스토르(Benait Textor)에게 헌정하기 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7년후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한 친구가 아내를 잃었을때, 그를 위로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훌륭한 아내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당신을 얼마나 잔인하리만큼 고통스럽게 하고 상처를 주는지, 자신은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다고 말입니다. 칼빈 자신은, 7년전 아내를 잃었을때, 그런 슬픔을 이겨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고 솔찍한 심정을 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 칼빈의 정황을 상세히 고려하면서, 아래의 편지를 자세히 읽어본다면,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고 존경하는 그의 속 맘을 우리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칼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편지와 그의 정황은, 우리가 어떻게 칼빈에게 접근해 가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의 실마리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우리와 동일하게, 한 시대와 삶속에서 행복해하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하는,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 실존으로서의 "그리스도인 칼빈"인 것입니다.
이런 칼빈에 대한 이해는, 그에 대한 찬반의 양극단적인 평가를 넘어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위로와 용기를 주는 따뜻함으로 다가오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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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레에게,


비록 아내의 죽음이 내게는 몹시도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는 한 슬픔을 억누르고 있답니다. 친구들 또한 나에 대한 그들의 의무에 신실합니다. 참으로 그들은 나와 그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내가 그들의 관심에 의해서 얼마나 힘을 얻었다고는 겨우 말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당신은 내 마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만약 나에게 강력한 자기 통제력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오래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나의 슬픔은 결코 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동료를 잃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는 내가 가난할 때 자발적으로 삶을 나누어 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속에서 조차도 말입니다. 그녀는 살아 생전, 내 사역의 신실한 돕는 배필이었습니다. 그녀로부터, 나는 어떤 사소한 방해조차도 결코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은 병들어 내내 누워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나에게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자기 자신보다 자신의 아이들을 더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런 개인적인 염려들이 쓸데없이 그녀를 괴롭힐까봐 두려워서,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삼일 전 나는 기회를 잡아서 말했습니다. 그녀의 아이들에 대한 나의 의무를 감당하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그녀는 즉시 말했습니다. :

“저는 이미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답니다.” 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들을 돌보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맡겨진 일들을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 또한 어느 여인이 그녀에게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 나와 이야기 해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답을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들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건한 지식을 갖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훈계해야 한다고 내 남편을 다그쳐서는 않됩니다.
만약 그들이 경건하다면, 내가 확신컨대, 그는 그들의 아버지로서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간청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마음의 고귀함은 백 마디의 조언보다도 나에게 더 책임을 지울 것입니다.

당신의 우정어린 위로에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가장 뛰어나고 신실한 형제여.
주 예수께서 당신과 당신의 아내를 지키시고 지도하시기를 빕니다.
그녀와 형제들에게 저의 최고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1549년 4월 7일.

죤 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