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소리나라 (http://sorinara.new21.org) 소유입니다.


칼빈과 시편 주석, 그리고 신학

성희찬


다음은 아래 제가 공부하는 신학교 셀더러하위스 교수 (Selderhuis) 가 칼빈의 시편주석과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두 시간 강의한 것을 제가 노트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셀더러하위스 교수는 최근 칼빈의 시편 신학에 관한 저서를 출간한 바가 있읍니다 (제목: 가운데 계신 하나님). 교수님은 한 시간은 시편주석의 신학을 강의하였고, 둘째 시간은 칼빈의 시편주석 중 시편 130편과 62편 (라틴역) 을 예로 칼빈이 쓴 몇 단어를 저희들과 확인하면서 칼빈 신학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한 김에 여러분께 아래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칼빈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제가 잘못 알아 듣고 이해한 부분이 있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새겨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약간의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강의를 통해 칼빈의 시편주석을 꺼내 다시 읽게 되었고, 시편을 정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침에 읽는 성경을 시편을 한편 씩 읽으면서 칼빈의 시편 주석을 보기로 말입니다. 사실 개혁교회에서 시편은 예배에서나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아시는대로 시편은 예배에서 기도로 불려질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시편을 노래부르다 보니 (개혁주의계통국민학교에서는 매일 시편 찬송을 부를 뿐 아니라 매주일 시편 찬송을 하나 외워서 시험칩니다) 우리가 찬송가 가사를 대략 외우는 것처럼 개혁교회 교인들도 시편을 대략 외웁니다. 여건이 되신 분께 칼빈의 시편주석 일독을 추천합니다.


1. 칼빈의 시편 주석 못지 않게 루터와 어거스틴의 시편 주석 또한 유명하다.

2. 최근 칼빈 연구 동향 중 하나는 칼빈의 전기를 통해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이다. 종래 방식은 주제 별로 신학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신학을 이런 관점에서 서술한 책은 더러 있다, 특히 에릭슨이 청년 시절의 루터를 심리학에서 접근하였다).

3. 칼빈 스스로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를 알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그가 주고 받은 편지 등이다. 무엇보다 그가 쓴 시편 주석에서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즉 여기서 비신학적인 심리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시편주석서문에서 칼빈이 개혁가로 회심한 사실을 (‘예기치 않은’ 회심으로 말함. 여기서 subito 라는 말은 ‘갑자기’ 라는 말로 이해하기 보다 ‘예기치 않은’ 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칼빈은 서문에서 자기가 천성적으로 수줍어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칼빈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기 이야기나 자기 경험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시편주석을 읽을 때 칼빈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지를 문맥에서 찾으라. 이로써 칼빈이라는 인물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칼빈의 신앙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칼빈 신학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다 (*** 시편주석서문을 읽으실 것을 추천합니다).

4. 시편주석의 출판 (1557년) 과 기독교강요의 최종 라틴판 (1559년) 출판을 비교해보면 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라는 차이가 있다. 두 책을 비교하여 어떤 문장에서 여자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칼빈이 위 두 책을 동시에 집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빈의 시편주석은 기독교강요의 목회적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의 주요 주제를 재확인하며, 실제적인 신앙 생활에 직접 적용될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5. 칼빈이 시편주석을 쓴 싯점은 비교적 안정된 시기로서 시의회 선거에서 로마교나 이단의 공격에서 승리한 이후였다.

6. 칼빈은 시편을 “영혼의 각 부분에 대한 해부” 라고 부른다. 즉 시편을 읽으면 마치 신체 각 기관이 수술대에 낱낱이 해부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 영혼의 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특히 부정적이고 어두운 인간 감정을 주로 제시한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한 감정이기도 하다: 고통, 의심, 공포, 두려움, 오해 등. 그래서 칼빈은 가족 중 누가 죽었거나 건강이 나쁜 사람, 위협을 당한 사람, 난민, 다른 사람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을 방문할 때 시편을 인용하였다. 칼빈은 진실로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칼빈주의가 시편주석에서 볼 수 있는대로 어둡고 약한 칼빈의 모습을 그리기 보다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칼빈주의에 결여된 점이라 할 수 있다.

7. 위에서 말한대로 칼빈은 시편주석에서 다윗과 자신을 비교한다. 자기가 겪은 예기치 않은 회심을 말할 때도 그렇다. 즉 다윗 역시 스스로 왕을 바라거나 선택하지 않았고 예기치 않게 왕으로서 기름부어진 것처럼 자신 회심역시 예기치 않게 되었다고 밝힌다. 또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설교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 역시 파렐이나 부쳐를 통해 (* 위 두 사람은 칼빈이 위 교회의 설교자로 가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기치 않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 다윗이 국외로 추방된 것이나 자식의 죽음을 경험한 것에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8. 칼빈이 시편에 대해 가진 애정은 다른 성경에 비해 남다르다. 에르윈 뮐하우프트라는 사람은 칼빈이 시편을 애호한 세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칼빈 자신이 어려울 때 시편을 통해 특히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위로와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둘째 칼빈이 주일에 설교한 유일한 구약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대개 평일에 설교하였으나 시편은 예외였다. 셋째 칼빈은 예배에서 시편 외에 다른 노래를 부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시편을 신자의 기도라고 보았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시편을 운율에 맞추어 부르지 않았으나 칼빈은 시편을 운율에 맞추어 개사하여 책으로 출간한다 (1562년 완성). 칼빈이 시편주석을 출간한 (1557년) 몇 년 이후 운율에 맞춘 시편찬송가를 출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9. 칼빈 시편주석을 이해하려면 ‘망명’ (asylum)이라는 요소를 염두에 둬야 한다. 칼빈 자신이 신앙 박해를 피해 조국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에 망명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또 스트라스부르그에서는 자신이 난민으로 지낼 뿐 아니라 자기처럼 신앙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나 그곳에 (스트라스부르그는 당시 유럽 에서 가장 큰 망명지였다) 망명한 프랑스인 망명자 교회의 설교자로서 약 삼 년을 목회한다. 제네바에서도 칼빈은 망명자로 살다가 죽기 바로 몇 년 전에 시민권을 얻게 된다. 칼빈은 쓴 이 용어 asylum 는 본래 법적 용어다. 즉 이 단어에는 망명자가 망명 장소에 머무는 동안 법적인 보호와 안전이 제공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 망명 장소는 교회다. 칼빈은 법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 용어의 법적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칼빈은 이 용어를 24번 사용한다 (칼빈이 이 단어를 인용한 라틴역 성경 불가타에서 이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아가 칼빈은 신자는 모두 ‘망명자’ 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망명하는 동안 신자의 안전과 보호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의 신학에 법적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10. 시편 주석 (라틴어) 에 나타난 몇 가지 용어 분석

앞에서 칼빈의 시편주석이 기독교강요의 목회적 변형이라는 것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즉 기독교강요의 주요 주제를 재확인하며, 실제적인 신앙 생활에 직접 적용될 형태
로 제시하고 있읍니다. 칼빈은 로보트처럼 교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관
점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시편 130편

(1) 절망 (desperationem): 칼빈은 130편 주석에서 이 용어를 여러 번 사용한다. 또 의심 (dubitationes) 이라는 용어 역시 마찬가지다.

(2) 칼빈은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동안에는 기도가 냉냉해진다고 해설한다. 루터 역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쉽이 없다고 말한다. 쉼이 있을 때 죄가 온다고 말한다.

(3) 칼빈에서 여기에서 대조적인 하나님의 상을 제시한다. 즉 ‘무한하신 하나님’ (immonsa potentiae). 칼빈은 교리를 로보트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실존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제시하는 무한하신 하나님은 절망과 의심을 경험하고 그 가운데 있는 신자가 기도로 간절히 필요로 찾는 그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은 이와 같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4) 선택이라는 용어도 이런 맥락에서 사용한다 (electi populi: 택한 백성). 즉 신자가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 대목에서 사용하고 있다.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것은 하나님의 택자라는 증거이며 또 나아가 하나님의 택자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한 것을 말한다.


2) 시편 62편

(1) 칼빈은 여기서 루터가 시편 119편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세 가지 도구 중 하나인 신자의 ‘시험에 맞서는 분투’ (tentatio) 를 말한다 (다른 두 가지는 기도와 묵상이다). 이 점에서 칼빈과 루터는 동일하다. 오늘날 개혁교회의 맹점 중 하나는 본문 해설에만 너무 치중한다는 것이다. 신자의 믿음은 곧 분투하는 체험으로 나아가야 한다.

(2) 칼빈은 인간은 안식을 바라나 신자의 삶에는 고통과 불안이 면제될 수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이런 감정을 사단이 요동시키면서 악화시킨다고 말한다. 사단이라는 용어는 본문에 나오지 않는 것을 칼빈이 사용하고 있다. 고통과 불안, 조급 가운데에서 신자는 침묵해야 하는데 칼빈은 이것을 ‘십자가’ (crucem) 를 지는 것으로 해설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하나님의 약속’ (in Dei promissionibus) 을 말한다.

(3) 그러나 신자는 한 번 시험을 만나 승리하더라도 곧 다른 시험을 만나게 된다.

(4) 칼빈은 우리가 만나는 불안을 바다 물결에 비교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단이 새롭게 주는 것이다.

(5) 이런 불안이 다윗의 본 (exemplo Davidis) 을 따라 우리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다윗의 본’ 을 말한다.

(6) 때로 우리가 고난 중에 ‘심연’ (labyrinthos) 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7) 즉 이런 고난으로 우리는 ‘점점 더’ (magis ac magis) 절망의 상태로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여기서 마치 자신이 아이가 죽고 아내가 죽은 경험을 말하고 있는지도?

(8) 그러나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inniti Dei promissionibus). 루터가 ‘하나님의 약속’ 을 강조하는 것처럼 칼빈도 마찬가지다. 이 절망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목양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