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해석자: 칼빈의 신학적 해석학과 해석자의 과제 :
안명준박사 (평택대학교 조직신학):

http://members.tripod.lycos.co.kr/amj5/index-calher.html


성경과 해석자: 칼빈의 신학적 해석학과 해석자의 과제 :
안명준박사 (평택대학교 조직신학):

I. 들어가면서:
II. 해석의 중요성:
III. 칼빈의 신학적해석학과 성령:
1. 해석자와 성령의 관계:
2. 성령의 역할:
3. 성령의 조명의 필요성:
4.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
IV. 해석자의 과제:
I. 들어가면서 :


중세시대의 문예부흥(Renaissance)은 파괴와 창조라는 중심적 주제를 동시적으로 사용하여 인류역사의 새로운 문화적 발전을 만들어 냈다. 이 주제는 Erasmus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들의 영향으로 Martin Luther, Ulrich Zwingli, 그리고 John Calvin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기존의 로마 카톨릭교회를 검증하고 잘못된 것들을 비판하였고 동시에 인문주의적 방법에 기초하여 성경을 올바르게 연구하게 함으로써 개신교를 탄생시켰다. 우리는 새로운 밀레니움의 시대에서 모더니즘(Modernism, 현대주의) 시대를 보내고 다원성(plurality), 이탈성(divergence), 타자성(otherness), 그리고 상이성(difference)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현대 후기주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도 르네상스의 중심주제는 이름을 새롭게 바꾸어 그 운동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오늘날도 이런 움직임은 해체(deconstruction)라는 이론을 통하여 모든 기존의 개념과 사상에 큰 변화를 주고 있다. 종교개혁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傳統)에 대한 도전과 파괴라는 속성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자들은 표준(標準)과 절대(絶對)가 없는 상대적이며 불확정성의 원리(the uncertainty principle)를 말하는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에 성경의 권위(auctoritas Scripturae)라는 확실하고 안정된 표준을 갖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점이 크게 다르다. 따라서 우리들도 성경이 말하는 권위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변화를 극복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크리스천으로서 미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해석적인 측면을 가지고 말하려고 한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세속사까지 엄청난 영향을 준 신앙운동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여러 가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종교개혁의 주체들이었던 Martin Luther나 Ulrich Zwingli 그리고 John Calvin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새롭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었던 그들의 해석적인 행위에서 나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대에 우리 역시 성경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려야 하고, 성경을 현대의 시점에서 올바르게 해석하는 제2의 종교개혁적인 사상이 있어야 함을 느끼게 한다. 분명한 것은 르네상스 운동이 인문주의자들을 통하여 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당시 잘못된 로마카톨릭 교회를 바로잡고 새로운 종교개혁에 영향을 준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오늘날 기존의 기독교 신학에 여러 형태로 영향을 주어서 과격한 포스트모던 신학을 만들고 있으며, 미래의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독교의 운동(an unknown new Christianity movement of the future in Postmodernism)의 형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제2의 루터나 칼빈과 같은 미래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의 선구자들이 되기 위한 준비를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올바른 성경의 해석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때, 성경의 해석이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의 권위와 힘은 해석이라는 그 행위 자체에 있지 않고 오히려 정당한 해석을 주는 여러 가지 학문적인 방법들과 신학적인 방법들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런 방법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은 성경해석의 꽃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의 역할이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라는 것은 루터와 쯔빙글리 같은 종교개혁자들 이후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는 해석자와 성령의 관계를 칼빈의 입장에서 조명하려고 한다. 이런 맥락으로부터 새 밀레니움 시대의 바람직한 해석자상을 제안하려고 한다.

II. 해석의 중요성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해석적 기능을 갖고 그 기능 을 사용하도록 창조되었다. 창조된 아담이 인류 최초로 한 일은 바로 해석행위였다. 창 2:19-23까지는 아담의 해석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여기서 아담은 언어를 사용하여 이름을 짓는 해석적인 능력을 유감없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해석적인 기능을 타고났으며 그의 삶의 현장에서 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무이며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삶의 현장을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매우 중요한 사역임을 깨닫게 된다. Nicholas Wolterstorff는 해석이란 우리의 삶에 스며있어서 피할 수 없고 해석 없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은 세상을 올바르게 해석할 줄 알고 더 나아가 크리스천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올바른 해석적 유산을 남겨할 책임이 있다. Martin Buber는 기독교가 세상에 준 것은 해석학이라고 말했는데 우리에게 해석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된다.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성경 해석은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의 형성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종교 개혁자였던 Luther가 시도했던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루터의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가 발견되었는가를 스스로 질문해 본다면, 우리는 그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성경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aul Althaus는 루터의 성경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신학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주석이다. 그는 스콜라적인 의미에서 조직신학자가 아니오 중세 체제나 현대 신학의 의미에서 교의학자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기존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방법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부터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1521년 웜즈회의(the Diet of Worms)에서 그는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혔기 때문에 교황과 종교회의의 권위를 받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sola Scriptura를 강조하였다. 이 표어는 성경은 자증(自證)을 하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해석자라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루터에 있어서 sola Scriptura의 강조는 개신교의 대표적인 성경 해석원리인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원리가 되었다. 이 방법은 1519년의 작품들에 나타나고 후에 계속하여 그의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루터에 있어서 성경이 그 자체가 해석자라는 원리는 그가 성경의 권위와 명료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왔다. 루터는 1519년 7월에 에크(Eck)와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isputation)에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나는 거미가 물에 침투하는 것처럼 그 신학박사 (에크)가 성경을 관통하는 것에 유감스럽다. 사실상 그는 마귀가 십자가로부터 도망가듯 성경으로부터 도망간다. 그러므로 교부들에 대한 존경과 함께 나는 성경의 권위를 선택하고 나를 판단할 사람들에게 그것을 권했다. 1517년에 루터의 95개 조항을 지원했던 에라스무스는 7년 뒤, 1524년에 그의 책,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On the Freedom of the Will)에서 예정론과 인간자유에 관해 루터와 논쟁을 일으켰다. 루터는 1525년 그의 책, 의지의 노예 (The Bondage of the Will)에서 에라스무스의 잘못된 성경 해석관을 지적한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은 어두운 책이기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책의 사람들에 의해서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에 루터는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하였다. 성경의 명료성은 루터를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에게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원리를 제공해 주었다. 루터는 자신의 교리서들 (Catechisms) 가운데서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원리의 몇 가지의 패턴을 보여주었다. 루터에 있어서 성경의 해석은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요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칼빈은 역시 올바른 성경 해석은 올바른 신학 형성과 직접적인 관계를 말한다. 칼빈은 1559년 8월 1일 제네바에서 자신의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에서 자신의 책의 목적이 신학도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임을 말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건전한 신학을 형성하는데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 G. Ebeling과 J. Pelikan의 지적대로 신학사란 성경 해석의 역사라고 말한 점을 고려해 볼 때, 건설적인 신학활동을 위한 해석학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프리토리아 대학의 C.J. Wethmar 교수가 제2차 세계개혁신학회의에서 말한 것처럼, "신학은 근본적으로 해석학적 학문으로 그 주된 목적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영원한 기초와 근원으로서 성경을 역사적이며, 조직적이며, 실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라고 본 점이다. 칼빈은 자신의 해석이 교회의 공적(公的)인 유익을 증진시키기(publicum Ecclesiae bonum induxisset) 위한 것임을 밝힌다. 자신의 해석적인 작업을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헌하는 것이었다. 특히 로마서 주석에서 자신의 해석방법은 간결성과 단순성의 원리(brevitas et facilitas)를 사용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성경을 쉽게 성경의 본문을 이해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방법을 사용한 성경해석의 결과는 신학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다. 예를 들면 세계 일차대전 후, 신정통주의 신학자 Karl Barth는 Der R merbrief를 출판함으로써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다. Gadamer는 바르트의 Der R merbrief 를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한 최초의 혁명적인 폭발로(the first revolutionary eruption), 또 일종의 해석학적 선언서로(a kind of hermeneutical manifesto) 본다. 해석(解釋), 혹은 주석 (exegesis)이란 말은 고대 아테네 신전(神殿)에 살고 있던 신전 해석자들이 신탁(神託), 종교적이나 의식적 법들, 그리고 하늘의 징조를 해석하면서 생긴 말이다. 오늘날도 새로운 샤만 르네상스를 추구하는 세상의 많은 종교 철학자들이 샤만을 통하여 인간문제의 해결을 정당하게 받아드리는 포스트모던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샤만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대중들에게 전달하려는 신(新) 문화적 재생의 시대에서 샤만들이 인간에게 주는 현대 인간문제에 대한 해석은 큰 권위를 갖게 될 것 같다. 이런 시점에서 참된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학도들은 역사와 크리스천의 공동체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큰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요셉과 다니엘의 경우에서, 해석의 역할이 그 시대의 중요한 인물들과 국가의 역사를 주도했다. 요셉은 어떻게 바로왕의 꿈을 해석했는가? 다니엘은 어떻게 세계의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해석했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려주는 성경의 해석자로서 거듭야 한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참된 해석자를 찾고 있다. 종교개혁(宗敎改革)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겸허하게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을 해석적인 관점에서 조명해 보는 것도 오늘날 말씀 앞에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칼빈은 자신의 나라에서 쫓겨나서 파란만장한 삶을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해석자로서, 성경의 해석자로서, 제네바의 해석자로,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해석자로서 살았다. 해석자로 칼빈의 삶의 원천은 역시 그 중심에 성경이 있었다. 성경이 그 삶의 모든 표준이었다. 신학의 방법은 물론이거니와 해석 방법론까지, 삶의 해석까지 성경에서 그 원리를 찾았다.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그는 성령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보여준 신학자였다. 그의 성경 해석은 성령의 분명한 역할 속에서 이루어 졌었다. 해석학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방법을 모두 습득하고 사용해야 하지만, 칼빈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이런 이해는 21세기의 해석자를 위하여 필수적인 관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III. 칼빈의 신학적해석학 성령

칼빈은 학자들에 의하여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 당시에 성령을 강조한 신학자이다. 그의 많은 공헌 가운데 그의 성경 해석학은 위대한 유산으로 인정되었다. 그가 사용한 해석 방법론은 여러 가지로 논의될 수 있으나 필자는 해석자와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칼빈이 사용한 성령의 조명에 의한 해석 방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러 면에서 도전을 준다.
1. 해석자과 성령의 관계
오늘날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사나 성령의 조명과 같은 말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말일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는 그를 알지 못하고, 우리의 삶에서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성경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서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을 완전히 배제시킨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 역사하심, 조명하심은 칼빈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신학적 해석 방법이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록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빈은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the internal witness of the Holy Spirit)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기원이 신적이라는 사실을 믿게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영으로 기록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러 방법적이며 신학적인 전제들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한가지 중요한 칼빈의 해석 방법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방법이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과 관련하여 칼빈이 사용한 신학적 해석 방법 즉 성령의 조명에 의한 해석 방법이다. 오늘날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누구든지 성령의 조명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신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성령의 조명이란 성령이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신비한 음성으로 자신의 계시를 구술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의 조명이란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칼빈은 성령의 조명에 의한 신학적 해석 방법을 그의 성경 해석에서 올바르고, 그리고 분명하게 사용하였다. 과연 성령의 조명이란 어떻게 칼빈의 신학적 해석학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해석과 성령의 관계를 칼빈의 입장에서 규명해 보려고 한다.
2. 성령의 역할
"성령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라고 전제하는 것을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켜 왔다. 실존주의 해석학을 주창한 불트만과 언어의 기능에 관심을 갖는 신 해석학파인(New Hermeneutic) 현대 자유주의 해석자들은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지만, 칼빈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필연적으로 여긴다. 칼빈을 따르는 소수의 개혁파 신학자들 역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는 신학자와 목회자에게도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役事)의 중요성은 강조되어야 한다. 만일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해석자는 단지 이성에 근거한 학문적인 방법으로 종교의 경전을 윤리적으로 해설하는데 그치게 될 것이다. 해석자가 성경을 해석할 때, 본문에 대한 관계는 성령의 감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게르스트너가 말하기를 성령의 역할은 증언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진리를 거부하는 데서 벗어나 진리를 순종하도록 인간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고 증거하는 성경 말씀 그 자체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을 수단으로 해서 신비한 내적 계시를 체험하려고 한다. 이것은 종교 개혁시대에 재 세례파가 내적 광명을(Inner Light) 주장한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선택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도록 한다고 했다. 윌필드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로 불렀는데, 칼빈은 당시에 루터나 쯔윙글리, 멜랑톤 등과 같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 보다도 성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더많이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에 있어서 특이한 것은 그가 성령의 조명을 해석학적 관점에서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점과 관련하여 구약학자 챠일즈는 성령의 조명에 대한 연구는 칼빈이 철저하게 발전시켰기 때문에(Inst. 1. 7) 더이상의 노력이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칼빈은 로마 카톨릭 추기경인 사돌레토에게 보낸 글에서 성령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령이 교회를 비추어서 성경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들 가운데 한가지는 그 교회가 성령과 성경 위에 자기의 권위와 전통을 두는 것이다. 트랜트 회의에서는 개인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 엄하게 처벌하는 조항을 갖고 있다.
3. 성령의 조명의 필요성
칼빈의 신학적 해석학의 전제는 인간과 그리고 성령의 영감으로 된 성경과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즉 성경과 인간성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가 칼빈 해석학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어떤 책이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볼 때,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은(Dei cognitio et nostri), 비록 이것이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어 왔지만, 칼빈의 신학적 해석 방법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특별히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칼빈의 신학적 전제는 매우 중요하였다. 인간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해석자로 하여금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칼빈의 성경 해석학이 그의 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인간이 자연적 오염을 통해 전적(全的)으로 타락되었음을 말한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되었다는 것은 어거스틴의 사상으로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고 칼빈의 신학에서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에베소서 5:8의 주석에서 칼빈은 자연인(自然人)을 어두움이라고 불렀다. "어두움은 중생하기 이전의 모든 자연인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비추지 않고, 오직 두려운 어둠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향하기 전에는 그의 모든 삶이란 파괴적인 미궁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인간은 죄와 어두움 아래 있게 된다. 칼빈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주장한다. 플오르는 칼빈의 해석학에 인류학적인 배경을 적용한다. "성경 이해와 관련하여 칼빈이 성령을 강하게 강조하는 신학적 배경은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의 전적 타락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자연인은 성령의 조명 없이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의 영적 진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 조명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칼빈은 중생하기 이전의 인간이성은 성경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 이성의 빛은 어두움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의 타락이 인간 이성을 질식시킨다고 칼빈은 생각하였다. 우리는 올바르게 생각할 자격이 없다. 우리의 이성적인 기능은 비참하게 타락하였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의 이성은 단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복음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 우리의 명석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지적하기를 심지어 그리스도까지도 우리의 이성을 의지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칼빈은 좋은 해석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성령을 알지 못하며, 또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중생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를 대면할 수 없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에 의해 영감되었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헤인즈는 말하기를 성령은 "인간 마음의 자연적인 저항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 칼빈은 믿음의 사람이 성경을 해석할 때, 성령은 해석의 인간적 과정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불안전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셔야 한다. 칼빈은 성령은 우리의 정신으로 깨닫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성령의 힘에 의하여 마음이 힘을 얻지 못한다면 그 마음은 성령에 의하여 조명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지 않는다면, 성경해석 시에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주님께서 그의 영으로서 사람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칼빈은 1545년 제네바 교회 교리 문답서에서 우리의 마음과 성령의 조명과의 관계성을 말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의 생각은 너무 오만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것이 계시되고, 성령의 조명을 받는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성경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칼빈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우리는 적절하게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4.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 칼빈은 해석자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그를 죄로부터 보호하고 본문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조명과 인간의 해석 사이에 관계에 대해 질문을 갖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비록은 칼빈은 성령의 조명이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한 세밀한 방법을 논한 작품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조사해 본다면 우리는 칼빈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활동으로서 몇 가지의 강조한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칼빈은 성령이 성경의 참된 저자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해석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성령님께 있다. 결국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해석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 브로밀리 또한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며, 성경의 적절한 이해를 위해 본질적이다 라고 말한다. 루터는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며, 그의 빛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방법으로 성경을 왜곡시킨다고 말했다. 유일한 해석자로서 성령을 말하는 것은 성경의 둘레를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칼빈은 '성령, 그 자신이 해석자' 라는 말로써 그의 해석학의 신학적 전제를 설명한다. "복음의 교리의 원천인 성령은 우리에게 그것을(복음의 교리) 열어줄 수 있는 참된 유일한 해석자이시다. 그러므로 그것을(복음의 교리) 판단할 때,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반드시 장님이 될 수밖에 없다." 칼빈은 말하기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은 스스로가 참된 유일한 해석자다" 라고 한다.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은 확실한 해석자" 라고 말한다. H. W. 루소는 이것이 영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라고 오해받지 않게 칼빈의 견해를 방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이 유일한 참된 해석자로 보는 칼빈의 교리는 쉽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성경을 정확하기 해석하기 위한 조종은 인간의 해석 활동이 역할을 하지 않은 하나의 순수한 신비적인 사건이다. 그런 영적인 해석은 칼빈이 설명을 분명하게 주지 않지만, 본문 해석에 광범위하게 공헌을 주었다. 칼빈은 비록 인간이 성경을 해석하지만, 성경 해석의 참된 권위는 인간이 아니라 언어의 최고 권위자이신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은 내적 선생이요, 충성스런 해석자이다. '성령이 유일한 참된 해석자이다' 라는 칼빈의 견해는 결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인간적인 측면을 결코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성경의 저자는 성령의 도구임을 주장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모세는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지 않았고, 성령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을 구술하시고, 그의 입에 그것을 제안하셨다." 라고 한다. 사도들은 성령의 확실하고 진정한 기록자들이었다(certi et authentici Spiritus Sancti amanuenses).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칼빈에게는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저자들은 성령의 도구들이었다. 성경의 문학적 스타일에 관하여 논평하면서 칼빈은 인간 저자의 정신은 성경을 산출하는데 남아 활동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칼빈 또한 이 과정은 성경 저자들의 전체 인격들이 관련되었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만을 믿지 말고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참된 해석자이신 바로 성령이시다. 두번째로, 칼빈은 성령의 의도를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의 의도는 성경의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의도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의도를 이해함이 없이는 결코 성경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이 말씀하신 그 목적에서 우리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참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칼빈만큼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의도를 강조한 해석자는 없었다. 스가랴서 5:1의 주석에서 칼빈은 말하기를 "성령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해석자들은 결코 이 예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성경의 구절들에서 성령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칼빈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저자를 강조한 사실은 그의 주석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의 의도란 무엇인가? 칼빈은 성령의 의도를 우리 마음속의 새로운 내적 계시로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성령의 의도는 성경 밖에서 오지 않고, 오히려 저자가 성령의 말씀을 통하여 기록한 본문 안에 나타난다. 칼빈은 성령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과 같은 저자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령의 의도를 성경 저자의 의도와 동일시한다. 칼빈은 성경의 참된 의미를 성령의 의도로 본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의 의도를 찾는 것은 본문의 참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번째로,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리쓰는 칼빈이 믿음의 유추를 규정하는데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 칼빈이 믿음의 유추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데 실패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강조한 자신의 신학에서 성경의 통일성을 충분하게 다루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칼빈이 믿음의 유추나 사랑의 유추를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그의 신학을 매우 어렵게 인도한 반면에 불링거는 믿음의 유추와 사랑의 유추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리쓰는 칼빈이 믿음의 유추에 의하여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탑페르너는 주장하기를 칼빈은 성령의 의한 믿음의 유추를 사용했다고 한다. 성례전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말하기를 칼빈이 해석학적 법칙으로 믿음의 유추를 성례전 설명에 사용했다고 한다. 리쓰의 견해와 탑페르너의 견해 가운데 믿음의 유추에 관해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가? 탑페르너의 진술이 리쓰의 견해보다 더 정확하다. 푸르만에 따르면, 칼빈의 장점은 믿음의 유추에 의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은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며, 오직 믿음에 의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성경은 믿음이 있을 때만 이해가 될 수 있다. 칼빈에 따르면 "오직 믿음이 이해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이해는 믿음과 분리될 수 없다." 칼빈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간 이성이 아닌 성령을 통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것은 그의 유일한 선물이며, 또 믿음은(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는 올바르게 알려진다) 성령의 조명으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인간의 정신은 그것을 이해를 할 수 없고, 우리를 단지 본성으로 인도한다." 칼빈은 믿음이 이해를 앞서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상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순종함과 함께 시작하며, 이해를 앞서며, 그런 방식으로 믿음은 확실한 지식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한다." "눈으로도 결코 보지 못하고 귀로도 결코 듣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초월하는 모든 것들을"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더욱더 많은 이해의 불빛을 불태울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역사는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고, 우리를 조명하는 성령의 힘에 의해서 된다. 우리가 믿음에 따라 성경을 해석 할 때 성령은 우리가 육신의 이성에서 보호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인도하신다. 넷째로, 칼빈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성령의 조명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오 전능한 하나님 우리에게 올바른 판단력이 없을 때, 또 우리 마음이 대낮에조차 소경이 될 때, 당신의 영으로 우리를 비추사 당신의 말씀의 빛에 들어가게 하소서." 칼빈은 우리가 성령의 의도에 의해 다스려지기 위하여 기도해야 함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올바른 이해를 주시는 성령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을 수 있다." 챠일즈도 성령의 조명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하는 일이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칼빈과 챠일즈와 같은 의견을 갖지 않은 학자들은 성경 해석을 위해 기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 칼빈은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단지 문자를 배우는 열매 없는 일에 힘을 소비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기도 생활과 그가 성령을 의지하는 일 사이에 하나의 고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칼빈은 성경 해석자는 그의 부족과 무지를 알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성령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을 믿었다.
IV. 해석자의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정황 속에서 해석행위가 왜 중요한지 특히 성경 해석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어떻게 실행되는지를 칼빈을 통하여 보았다. 이제 21세기에 바람직한 해석자를 위하여 몇 가지로 제안한다. 1). 21세기의 해석자는 성경과 자신이 사는 시대에 대하여 항상 열린 마음을 갖고 자신의 사고를 시대에 맞게 말씀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변화성(transformation)이란 개혁신학의 강력한 힘이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로마 카톨릭교회는 전통에 묶여서 정지된 신학이기에 기존의 자신들의 전통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으며, 개인의 성경 해석을 금하지만, 개혁신학은 성경에 의하여, 성경을 향하여, 성경을 중심으로 항상 새롭게 온전하게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신학이다. 따라서 개혁신학에 변화를 추진하기 위한 원동력은 성경이라는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아울러 시대에 맞게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하려는 해석자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보여준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점이었으며, 자신들은 이것을 사역의 소명으로 보았다. 따라서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행위는 교회를 개혁하는 출발점이 되며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참된 도구가 된다. 루터와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경우에서 그들의 올바른 성경의 해석이 종교개혁의 불을 당겼고, 그들이 살았던 삶의 현장을 변화시켰던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바른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세워진 개혁된 교회는 힘이 있었고 사회와 역사를 주도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2). 21세기의 바람직한 해석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철저한 해석훈련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영적훈련과 학문적인 훈련이 있다. 이 두가지를 동시적으로 연마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단자로 전락하기 쉽다. 최근 영생교회 신도들이 우종진 목사와 더불어 자살을 통하여 고귀한 생명을 허망하게 버렸다. 도대체 우목사는 성경 해석을 어떻게 배웠기에 이런 사태를 만들었는지 안타깝다. 기독교의 모든 이단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다시 한번 해석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창세기 2:19-23까지 보면,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영적이며 지적으로 해석하는 훈련을 받았다. 우리의 해석훈련은 학문적인 방법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성스러운 해석자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영적 해석훈련은 해석자의 태도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하며 자신을 말씀으로 경건하게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이런 훈련이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이며 영성 만능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학문적인 훈련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칼빈이 당대의 인문주의의 훈련을 통하여 철학과 수사학(修辭學)을 소화하여 자신의 해석적인 작품 속에서 사용했듯이 우리 또한 세상의 학문과 새로운 이론 그리고 새로운 방법을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 따라서 해석자는 영적인 면과 학문적인 기술을 잘 겸비하여 해석에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를들면 칼빈의 로마서 주석은 이 두 가지를 균형있게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칼 바르트가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이 역사적이며 영적인 해석을 분명하게 결합시킨 점에서 기쁨을 얻었다고 하면서, 칼빈의 로마서 주석은 자신의 Der R merbrief의 연구에 외형적인 모델뿐만 아니라 로마서의 내용을 위한 확신한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해석을 위한 전문 지식인으로서 최대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원어(原語)에 대한 능숙한 사용은 물론 세상의 학문적인 방법들을 습득해야 한다. 정보에 익숙한 문화인으로서 그 정보를 분석하고 사용하여 자신의 해석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루하루 지식과 정보가 발전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는 정보와 지식을 처리하는 능력을 배워야 21세기의 바람직한 해석자로서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런 학문적인 습득과 영적인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참된 해석자는 성경에 근거하여 미래의 역사(歷史)를 예리하게 미리 진단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해석자는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예언자적 역할은 소위 말하는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이어서
--------------------------------------------------------------------------------

21세기의 해석자:칼빈해석학에 있어서 성령과 해석의 관계 I

4. 하나님의 영이 해석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거룩성 이다. 해석자는 성스러운 사람이다. 해 석자 자신이 본질적으로 성스러워서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주체가 되는 성령이 거룩한 하나 님의 영이시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이기 때문이다. 해석자란 말씀에 대한 신성한 사역을 감당하는 자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란 일시적인 황홀 속에 지껄이는 신비한 계 시도 아니며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를 심리학적으로 조사하는 일도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위한 자신의 거룩한 삶을 통한 신성한 봉사의 사역이다. 따라서 해석자는 자신이 거 룩하고 성스런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항상 인식하여 한다. 참된 경건와 자신의 삶을 거룩하 게 유지할 때 참된 해석자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성경의 해석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요셉과 다니엘의 경우에서 그들의 삶은 유대인 종교의 언어적인 놀이가 아니었다. 그들이 해석시에 사용한 언어는 참된 해석자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해석이 힘을 가지고 있었 던 배후에는 그들의 거룩한 삶이 있었다. 말씀의 해석자는 거룩함을 보여야한다. 비록 세상 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죄악에 물들지 않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속에 자신이 더렵 혀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신성한 해석적인 능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받게된다. 세상 사람들 이 목사들을 무시하는 이유는 바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또 깨끗한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목 회자가 무당보다 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삶을 산다면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지금 시대 는 강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성결한 삶을 사는 해석자가 되어야 하나님과 사람들로 부터 힘 과 권위를 얻을 수 있고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Ebeling은 sola Scriptura의 원리는 오직 경험(sola experientia)의 원리를 통해 해명되고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오 직 경험이 신학을 만든다(sola experientia facit theologum)라고 말한다. 따라서 경험을 어 떻게 하는지는 신학과 해석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으로 거룩한 삶의 체험은 올 바른 신학의 형성과 성경 해석을 위하여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성화가 칼빈신학의 중요한 요소임을 감안할 때 개혁주의 해석자의 거룩한 삶은 성경 해석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로마서 12장 2절은 우리가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수동 태이며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올 바르게 해석할 것을 말한다. 바울의 말을 종합하여 말한다면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성결한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참된 해석자로 거듭나게 된다.
5. 성령의 해석자는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현대의 급진적인 신학 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자에게 역사하신다. 성령과 말씀의 관계에 대하여 Lutheran은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서(per verbum)만 역사 한다고 하여 성령이 말씀 안에 구속되는 듯한 주장을 하지만 우리 Reformed는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과 함께(per verbum, cum verbo) 주권적으 로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석자는 성경의 해석시에 자신 안에서 성령이 이렇 게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도록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에 대하여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그의 인도하심과 조명하심을 통하여 말씀을 해석 할 때 겸허하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신학 을 연구하는 자는 성령 충만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이 자신 의 지혜로 모든 학문을 통달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도움이 항상 함께 해야 한다. 칼빈은 이해의 영이 하 늘로부터 임하는 자가 적절하고 충성스런 하나님의 해석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참된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한 노력은 필수적이다. 김영한 교수는 개혁 신학적 사고의 원리는 오로지 성령에 입각한 사고라고 말한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성령 에 의한 해석원리들이 방법론적으로 많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6. 21세기 교회를 위한 해석자로서 준비가 필요하다. 최근 한국에서 열린 세계칼빈학회가 그 주제를 칼빈의 목회사역에 두었다. 칼빈의 신학은 어떤 상아탑의 이론을 쌓았던 스콜라주의 의 재생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신학의 새로운 전환 점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주석이 바로 이런 실제적인 기독교 공동체을 돕기위한 목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오늘날도 그 영향은 지속되고 있다. 신학의 목적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 되 어야함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21세기의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해석자로서 준비가 요구된다. 칼빈이 말했듯이 해석자의 최선의 노력은 교회의 공적인 유익을 위하는 것으로 삼아야 한 다. 해석자의 멧세지를 듣는 자들에게 유익과 도움을 주는 공헌이 요구되기 때문에 이를 위 해서 준비해야 한다.

7. 한국적 해석학을 위한 새로운 모색이 있어야 한다. 서양의 기독교는 한국교회와 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많은 혜택을 보았고 앞으로도 서방 기독교의 영향은 많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 신학자들은 기독교는 서구의 기독교라는 등식이 서서히 무 너지고 있다고 한다. 점점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을 중요시 하면서 기독교는 다양성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는 성경을 중심으로 통일성을 갖는 유일 한 계시종교로서 특성이 있다. 다양성과 통일성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기독교로 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세계 기독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한국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오 늘날 신학은 한국인 위한 한국적인 특징을 갖는 시대적 요구를 요청 받고 있다. 여기에 해 석학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서구의 신학은 자신들의 철학과 문화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발전시켰다. 이런 것들이 자신들의 해석학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도 5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과 풍습과 전통과 사상이 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성경에 근거하여 새롭게 조명되어 한국적 해석학의 태동과 발전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한 국의 전통사상을 다시 한번 재생시켜 한국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에 큰 공헌이 되 는 새로운 성경 해석학의 모델이 나왔으면 한다.